인제
3일 차도 마찬가지로 시작은 원주버스터미널이었습니다. 인제로 가는 버스를 타야했는데 정확히는 원통으로 가는 버스였습니다. ‘인제 가면 언제 오나.’라는 말을 자주 사용해서 인제의 지명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인제를 방문하는 것은 처음이어서 설렜습니다. 횡성과 홍천을 지나자 소양강이 나왔습니다. 소양강을 끼고 산봉우리들이 길게 늘어져 있었으며 그 바로 위로는 구름이 깔려 환상적인 경관을 자아냈습니다. 그 풍경을 보며 한참 산골로 들어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는 전적지 관련 기념물들이 많아 이 험한 산세에서 벌어졌을 70여 년 전의 전투들이 절로 떠올랐습니다.
인제터미널을 지나 10분 정도 더 가서 버스는 원통 터미널에 사람들을 내려주었습니다. 원통터미널 근처는 여느 시골 터미널답지 않게 다양한 체인점들이 있었습니다. CGV, 파리바게트, BBQ, 다이소, 투다리 등등. 음식점은 그러려니 해도 술집까지 있는 게 정말 신기했습니다. 그렇다고 주거단지가 많은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죠. 이 궁금증은 원통에서 진부령 가는 버스를 탈 때 해결이 되었습니다.
제가 가려는 만해마을은 원통에서 진부령 가는 버스를 타고 갈 수 있었습니다. 원통에서 20분여 걸릴 정도로 꽤 먼 곳에 있었습니다(시골버스는 정차가 거의 없어서 20분 거리면 무척 먼 곳까지 갑니다.). 인제 북천을 따라 올라가는 길은 풍경이 무척 수려해서 그저 그냥 가는 길인데도 풍경을 보고 있기만 해도 무척 즐거웠습니다. 아, 갈 때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이곳에 군부대가 가득했다는 점입니다. 육군을 전역하신 분들이라면 사실 잘 아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저나 제 주변인들은 대부분 공군 전역이라 원통 근처에 이렇게 많은 군부대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다양한 체인점의 주 소비층도 군인과 군인을 면회하러 온 면회객들이겠죠.
그렇게 버스를 타고 정류장에서 내려 15분 정도를 더 걸어가야 합니다. 가는 길은 거의 아무것도 없는 시골길입니다. 다만, 이번에 2023강원세계산림엑스포의 행사장 중 하나가 가는 길 근처에 있어 막 공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 만들어진 정원이 무척 예뻐서 기회가 된다면 한 번 와서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엑스포장과 이어진 묵직한 느낌을 주는 솔밭을 지나치고 나면 북천을 건너는 다리가 나옵니다. 그 다리에서부터 번듯한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만해마을이 눈에 들어옵니다.
동국대에서 만해를 기리고, 만해축전을 열며 불도의 수행을 위해 만든 만해마을은 전부 콘크리트로 지어졌지만, 고요하고 묵직한 분위기만큼은 무척 잘 살렸습니다. 솔직히 이번 여행을 하면서 처음으로 맘에 드는 건축물을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근처에 아무것도 없으니 가만히 북천을 바라보며 명상을 하기 딱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일정이 촉박하여 마을을 재빨리 둘러보는데 초점을 맞추기로 하였습니다.
만해마을의 입구는 온갖 잡다한 생각을 단호히 물리치고 지름길로 들어간다는 경절문(徑截門)이 지키고 있습니다. 사각형으로 격식 있게 만들어진 문은 바라보는 순간부터 마음을 가다듬게 됩니다. 경절문을 지나면 바로 평화의 시벽과 만날 수 있습니다. 2005년 세계평화시인대회에 참가한 29개국 55명의 시인과 255명의 한국시인 작품 등 310편의 시를 동판에 담아 평화를 바라는 세계시인들의 염원을 기념하고자 조성된 이 벽은 세계를 가로막고 있는 많은 벽을 평화를 담은 시를 통해 무너뜨리자는 의미를 담은 듯합니다. 가자지구를 분리해둔 벽에 뱅크시가 온갖 벽화를 그려둔 것처럼요.
평화의 시벽을 지나면 양옆으로 건물들이 나타나고, 그 사이를 얕은 물길이 지나갑니다. 시야의 끝에는 산과 하늘이 자리하고 있죠. 콘크리트로 만든 멈춤과 고요함, 그리고 정제됨을 물길이 이어나가 결국엔 자연까지 이어줍니다. 속세에서 흘러가는 사람들이 깨닫기 위해서는 멈추고 고요함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고요함 속에서 잊고 있던 자연스러운 흐름을 발견하고 인간이 만든 규칙이 아닌 원래부터 존재했던 삼라만상의 법칙을 찾아 그 흐름에 올라타야 합니다. 일하고 또 일하거나, 걷고 또 걷던 제 삶과는 반대되는 만해마을 건축 속의 가르침이 무척 좋았습니다. 바쁘디바쁜 순간들 속 한 줌의 평화를 찾아 무척 편안해졌습니다.
그 편안함을 안고 조금 더 나아가자 범종, 목어, 운판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사찰에 있는 사물(四物)인데 법고(法鼓)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어디 다른 데 있었겠죠? 그 건너편에는 콘크리트로 만든 무대가 있었습니다. 콘크리트로 만들었는데도 무척 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는 ‘왜 이것이 자연스러운 것일까?’ 고민만 하고 납득할 만한 설명을 내놓지 못했는데 얼마 전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에서 그 답은 얻을 수 있었습니다.
“콘크리트가 과연 돌과 다른가. 인공에 의해서 풍화된 돌의 표면과 인간에 의해서 절개된 콘크리트의 단면,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가짜인가, 무엇이 자연이고 무엇이 인공인가. (…) 한편으로는 인공적인 것들도 우리가 자연을 더 잘 느끼기 위한 어떤 요소가 아닌가. (…)”
≪콘크리트 월≫ 제천, 2023. 네임리스 건축. 나은중, 유소래.
콘크리트를 인간이 만들었으나 콘크리트의 재료는 자연에서 나온 것이고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인데 콘크리트를 인공이라고 나누고 자연이라고 나누는 것 자체가 기준점이 애매하다는 이야기지요. 이 이야기를 불교적 관점에서 조금 바꿔보자면 콘크리트를 자연과 인공이라고 구분 짓는 것 자체가 아집이라는 것입니다. 공간, 그러니까 자연의 흐름에 잘 어울리기만 하면 상관없다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콘크리트 무대는 그냥 그 자리에 놓인 것만으로도 자연과 인공을 모두 포함한 불교에서의 중도(中道)를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구분할 필요 없이 포용하여 그저 우주와 자연의 흐름대로 가는 것이죠.
한용운 또한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에게 있어 민족의 독립운동과 불자(佛子)로서의 수행은 구분해야 할 것이 아닌 따라야 할 하나의 흐름으로 보였을 겁니다. 독립운동이 수행이었고, 수행이 독립운동이었죠. 대한민국 고등 교육을 받았다면 누구나 알만한 시 <님의 침묵>에서 님은 여러 가지로 해석됩니다. 사랑하는 임, 오지 않는 독립, 불법의 진리 등등. 하지만, 한용운은 그것을 딱히 구분해서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만해문학박물관에 걸려있는 현수막의 글을 보면요.
“님은 보았습니다
(…)
목놓아 외치고 또 외치는 만세를
님은 비오듯 흐르는 눈물을 삼키며
만세소리를 가슴 가장 깊은 곳에 심었습니다
님이 무작정 오세암으로 출가했을 때보다
더 어린 아이들에게서
처음 품었던 마음을 다시금 보았습니다”
<평생 못 잊을 상처> 中
만세의 내용만 보면 님은 오지 않은 독립으로 해석되는 것이 맞아 보이지만, ‘오세암으로 출가’라는 내용은 님이 불법과도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독립과 불법으로 해석되는 님을 한용운이 사랑하지 않았을 리도 없으니 사랑하는 임으로도 해석되는 것이 당연하겠죠. 한용운이 써 내려간 문학에서 임은 무어라 구분 짓고 정의하는 것이 의미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저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삶의 방향과 목표를 임에 담았을 뿐이니까요. 그가 가고자 하는 앞길에 임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불도(佛道)에 그 모든 것을 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문학으로 표현했습니다. 이제 만해문학박물관으로 들어가 그의 문학과 그가 남긴 발자취를 따라가 볼 시간입니다.
한용운 하면 떠오르는 것은 보통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이미지로 대표되는 독립운동과 <님의 침묵>으로 대표되는 문학인의 이미지일 것입니다. 하지만, 한용운의 가장 근본적인 직업은 스님입니다. 그는 출가한 후 불도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고, 무너져가는 조선불교를 대중화시키고, 근대화시키기 위해 매우 노력했습니다. ≪조선불교유신론≫은 그의 그러한 노력을 보여주는 대표작이죠. 조선불교의 자주화를 위해 조선불교청년회의 총재로 취임해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근간이 불도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한용운의 성격은 대쪽같고 올곧다고 잘 알려져 있습니다. 무척 강한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죠. 대표적인 예시로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을 북향으로 지은 일화가 있습니다. 남쪽에 있는 조선총독부가 꼴도 보기 싫다고 심우장을 북향으로 지어버린 것이죠. 신채호가 조선총독부 방향을 보고 세수를 할 때면 허리를 꼿꼿이 선 채로 했다는 일화와 더불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강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나 그는 부드럽고 자비로운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밤늦게까지 제자들이 가르침을 듣다 잠이 들면 아랫목에 뉘어주고 이불을 덮어주었다고 합니다. 또한, 무척 낙관적인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님의 침묵> 中
그의 대표작 <님의 침묵>의 일부분입니다. 이 부분을 보면 그가 낙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슬픔의 힘을 옮겨서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이부었다는 이야기나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는다는 이야기는 그가 낙관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려줍니다. 이것은 불교적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으로 인과(因果)가 명확하고 순환을 중시하는 윤회의 세계관에서 일제강점기는 노력해서 넘어가야 할 한 번의 고비에 불과했습니다. 이에 기반해 한용운은 조선일보에서 조선청년에게 쓰는 글에 지금 사는 청년들이 행운아라며 오히려 지금의 고비가 사람들이 뜻을 세우고 깨달음을 얻는데 적합하다고 적어놓았습니다. 대단한 낙관론이지만, 그 낙관론이 그냥 낙관만 하며 허송세월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뜻깊게 다가옵니다. 고달픈 현실이지만, 늘 이것을 이겨낼 수 있는 의지가 있었다는 것이니까요. 그가 자주 사용했던 풍상세월 유수인생(風霜歲月 流水人生)에서 그의 이러한 생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바람과 서리가 치는 세월이지만, 이 또한 흘러가는 인생이라는 것이니까요. 그렇게 낙관론에 담긴 강력한 의지를 바탕으로 한용운은 1944년 죽을 때까지 일본에 단 한 번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습니다. 늘 자신이 추구했던 불도의 길을 걸은 것이죠. 그리고 고난의 세월이 지나고 인생이 흘러가듯 1945년 조선은 독립을 맞았습니다.
만해문학박물관을 나와서 만해를 다시 생각해봅니다. 그는 산속에서 수행하지 않는 속세에서 떠나지 않은 수행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불도에서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그는 늘 약자의 편에 서서 자비를 베풀고, 검소하게 생활했으며, 권력을 제멋대로 휘두르는 강자에게는 저항할 줄 알았습니다.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다는 것을 알기에 힘든 현실을 인식하면서도 낙관적인 시선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런 그에게 불도와 독립과 문학은 하나였습니다. 만해에게 님은 님일 뿐입니다. 그의 시선에서 님은 부처나 삼라만상의 진리, 민족의 광복, 사랑하는 누군가 그 무엇도 될 수 있고, 그 무엇도 될 수 없습니다. 그가 생각하고 표현한 모든 것이기도 하고, 그 어떤 것도 아니기도 하다. 오히려 무엇무엇이라 말하고 분석하는 것은 아집을 불러일으킬 뿐입니다. 만해의 님은 그의 깨달음에서 비롯되어 말과 글, 행동 내에 전부이자 무로 나타납니다.
구름이 조금 걷히고, 파란 하늘이 드러납니다. 그가 살아있을 때처럼 하늘은 여전히 고고합니다. 그의 깨달음과 뜻 또한 그가 죽었음에도 여전히 고고하게 남아 있습니다. 아아, 그는 갔지마는 세상은 그를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