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
여행의 시작은 원주로 정했습니다. 수도권, 그러니까 대한민국 기준으로 북서쪽에 사는 저는 대한민국 한 바퀴를 돌기 위해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 순으로 돌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자주 안 가보았던 강원도를 먼저 가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시계방향으로 도는 것이 익숙한 느낌이 들어서 선택한 것도 있습니다. 강원도에서 원주를 먼저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원주에서 강원도 이곳저곳으로 가는 것이 편해서. 갈수록 수도권에 인구가 집중되는 현상에 따라 강원도의 시외버스는 계획을 짜기 힘들 정도로 없다시피 했고, 강원도 내에서는 어떻게 이동 가능해도 나중에 경상도로 이동할 때는 춘천, 원주, 강릉 정도의 대도시가 아니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면을 고려했을 때 가장 괜찮았던 원주를 여행의 시작점으로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원주는 나름 유네스코 문학창의도시로 선정될 정도로 예술에 관한 이런저런 것들을 갖추고 있다고 인정받는 도시입니다. 근데 문제는 저도 당장 “원주에서 뭐가 떠오르냐?”고 물으면 대답하기 어려운 느낌이 듭니다. 원주 도심에서 한참 떨어진 뮤지엄 산을 제외하고는 원주에 뭐가 있는지도 몰랐으니까요. 아무리 뮤지엄 산이 좋은 건축과 좋은 정원, 좋은 작품들을 가지고 있는 곳이라고 해도 그거 하나로 원주가 유네스코 문학창의도시로 선정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겠죠. 뮤지엄 산이 문학과 깊은 관련이 있는 곳도 아니고요. 사실 원주의 문학적 인프라는 대부분 박경리 작가와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박경리 작가의 작품을 읽어보신 분들은 ≪토지(土地)≫는 경남 하동 평사리가 주 무대고 ≪김약국의 딸들≫은 경남 통영이 주 무대인데 원주는 무슨 상관이 있냐고, 물으실 수도 있겠습니다. 원주는 박경리 작가의 주요 작품들의 배경과는 전혀 관련이 없지만, 1980년부터 2008년 타계할 때까지 머무른 곳입니다. 가장 최근에 머무른 곳이다 보니 토지문화재단이나 박경리 생가와 같은 가장 최근의 삶의 흔적이 짙게 남아 있는 곳이죠.
그 삶의 흔적을 하나하나 찾아보기 위해 저는 먼저 박경리 뮤지엄으로 향했습니다. 원주버스터미널에서 34-1번을 타고 종점까지 가면 됩니다. 처음 만나는 도시의 시내버스를 탈 때는 정말 설렙니다. 원주도 꽤 발달한 도시라 이것저것 많았습니다. 무척 큰 재래시장, 버스터미널에서 원주역까지의 꽤 먼 거리 동안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아파트, 각종 사회기반 시설 등.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원주역에서도 사뭇 거리가 느껴지는 흥업저수지 옆의 연세대학교 미래캠퍼스였습니다. 생각보다 원주 도심에서 무척 멀어서 당황했고, 저수지를 옆에 끼고 있는 수려한 풍경에 감탄했습니다. 캠퍼스는 제법 넓었고, 개강 중이라 그런지 학생들이 무척 많았습니다. 문학 기행 중에 만난 활기찬 젊음의 전당은 참 보기 좋았지만, 뭔가 대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제가 나이를 좀 먹어서일까요?
연세대학교 미래캠퍼스에서 10분을 더 가면 버스는 종점에 도착합니다. 회촌 문화역사마을 입구에 내려주는데 여기서 약 5분 정도만 걸어가면 박경리 뮤지엄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박경리 뮤지엄은 원주시가 아닌 토지문화재단에서 운영하는 곳으로 작가들의 창작 활동 또한, 지원하고 있습니다. 입구에서부터 만날 수 있는 기숙사형 건물이 그 대표적 예시죠. 다만, 이 근처에는 편의점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고, 논과 산밖에 없었습니다. 살기는 좀 불편해도 창작 활동에 전념하기에는 참 좋아 보였습니다. 풍경도 아름다웠고요.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며 조금 올라가면 매표소와 3전시실을 포함한 가장 큰 건물이 보입니다. 거기로 들어가면 매표소 직원분이 짜잔하고 반겨주실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비도 오는 데다 워낙 외지에 있다 보니 찾는 사람이 없어 박경리 뮤지엄을 들어갈 거면 벨을 눌러달라고 하시더군요. 벨을 누르니 얼마 안 가 직원분이 오셔서 표를 구매하고 전시실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처음 들어간 3전시실에서는 박경리 작가가 1955년부터 2008년까지 집필활동을 한 걸 요약해두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박경리 작가의 삶과 마주한 순간이었습니다. 박경리 작가의 시작은 절절했습니다. 1955년 등단을 한 작가는 먹고살기 위해 글을 썼습니다. 먹고살기 위해 글을 썼다는 것이 매우 절절하게 다가오더군요. 이걸 표현하지 못해서, 이걸 꼭 말해야 해서가 아닌 먹고살기 위해. 그 말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대단하고 멋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부럽기도 했습니다. 글을 쓰면 먹고 살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니까요. 그만한 재능이 부러웠습니다.
1969년부터 쓰인 ≪토지≫도 작가의 고민 끝에 하고 싶은 말을 좋은 서사로 풀어내었지만, 처음엔 정말 먹고 살기 위해 썼습니다. 대한민국 국민 중 모르는 이가 거의 없는 대문호의 명작은 어느 한 단면으로만 보자면 그저 한 작가의 생계수단이었습니다. 하지만, 26년 동안 토지가 연재되고 단행본으로 발매되면서 박경리 작가는 유명해졌고, 여유가 생겼습니다. 여유가 생긴 작가는 ≪토지≫를 마무리 짓고, 자신의 사상을 본격적으로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합니다. 작가의 사상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전시실에서는 박경리 작가를 흙과 생명의 작가라고 표현하며, 작가의 사상을 드러냅니다.
“문화는 반드시 생명을 위한 것입니다. 생명을 위해 창조하고 발견하고 균형을 잡아나가는 것입니다.”
<생명을 존중하는 문화>, ≪생명의 아픔≫ 中
위의 글은 박경리 작가가 늘 생명의 소중함을 염두에 두고 글을 썼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이때부터 생명, 자연, 환경을 염두에 두고 박경리 작가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3전시실을 나와 1전시실로 향했습니다. 1전시실의 주제는 작가의 시간입니다. 작가 박경리가 아닌 사람 박경리의 이야기를 담고 있죠. 박경리 작가의 원래 이름은 ‘박금이’였습니다. 통영에서 태어나 1942년 진주고등여학교(現 진주여고)에 진학할 때까지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작가들이 대부분 그렇듯 어렸을 때부터 책을 읽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고 합니다. 박경리 작가는 시를 쓰다가 고등학교 선배의 남편인 김동리의 추천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해 1955년 현대문학에 등단합니다. 그 이후로는 생계를 위한 절절한 글쓰기가 이어졌습니다. 남편이 죽은 후 가장이 된 그는 늘 자신을 옥죄고 채찍질하며 글을 썼습니다. 작가는 1980년 서울(정릉)에서 원주 단구동으로 이사를 왔는데 그 이유는 글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매일 감옥을 드나들던 사위 김지하 시인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딸과 손주를 돌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딸과 손주의 삶이 좀 안정되고 나자 지금 박경리 뮤지엄이 위치한 흥업면 매지리에 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정착하여 토지문화재단을 만들고 토지문화관을 지어 후배 양성에 힘썼습니다. 지금도 매년 80명 정도의 작가가 이곳에 머무르며 열심히 창작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렇듯 끊임없이 글을 썼고, 작가 후배 양성에도 힘썼던 한국 문학계의 거두는 2008년 5월 5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박경리 작가의 묘가 있는 통영에서는 매년 5월 5일 추모제가 열린다고 합니다. 그의 죽음이 어땠을지 모르지만, 살 만큼 살았고, 이룰 만큼 이루었던 그의 삶이 마냥 불행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모진 세월가고
아아 편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옛날의 그 집>, ≪버리고 갓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中
홀가분한 마음을 가지고 다른 세상으로 작가는 떠났지만, 그가 살던 집과 쓰던 물건은 현세에 남았습니다. 사람은 갔지만, 손길과 숨결이 닿은 물건은 남은 것이죠. 그는 홀가분하게 떠났지만, 그의 삶을 좇아 온 저는 미약하게라도 남았을 삶의 흔적을 잡으러 2전시실, 그의 생가로 향했습니다. 생가는 자유 관람은 아니고 정해진 시간에 안내원의 도움을 받아야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실 생가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다양한 생가들을 보아왔지만, 박제와 같은 느낌이 들어 그리 생생한 느낌은 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박경리 작가의 생가는 달랐습니다. 거실, 부엌, 방 모두 쓰던 물건들이 그대로 놓여 있었고, 정갈하면서도 쓰기 좋게 놓인 물건들의 배치가 마치 사람이 아직 살고 있는듯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15년의 시간을 넘어 2008년 작가가 살이 있던 어느 시점에 도착한 듯했습니다. 펜, 컵, 냉장고, 선풍기, 각종 다기(茶器), 영양제, 작가가 입던 옷, 체중계, 홈키파 등 없는 게 없었습니다. 마치 작가가 어느 순간 튀어나올 것만 같았습니다. 아기자기한 소품들은 많았지만, 사치스럽지는 않은 그 집은 그의 성품을 대변하는 듯했습니다. 집의 대문 옆에는 고양이가 드나들 수 있도록 한 캣플랩이 있어 작가가 얼마나 고양이를 사랑했는지 유추해볼 수 있었습니다. 2008년 쓰임을 다한 집에 캣플랩이라니. 작은 생명들과 자연을 사랑한 작가의 따뜻한 마음씨가 전해졌습니다. 생가를 돌아가면 마당이 나오고 장독대와 자연 냉장고가 나옵니다. 이곳에서 텃밭을 기르고 채소들을 냉장고에 저장하며 장을 담갔을 작가를 상상했습니다. 소박함, 생명의 활력, 이런 것들이 삶의 흔적에서 짙게 배어 나왔습니다.
생가를 빠져나와 ‘꿈꾸는 자가 창조한다.’라는 글귀가 적힌 동상을 지나쳤습니다. 앞에는 이곳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작가들을 위한 식당과 숙소가 보였습니다. 그의 유산이 여전히 많은 작가에게 도움이 되고 있음을 깨닫고 천천히 박경리 뮤지엄을 빠져나왔습니다. 입구의 왼쪽에 회촌 종점 정류장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가만히 앉아 있다가 원주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탔습니다. 계획대로라면 원주 시내로 바로 가야 했지만, 안내원의 이야기를 듣다가 미래캠퍼스 내에 박경리 작가 문학비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크게 돌아가는 것도 아니니 가보기로 했죠.
연세대학교 내부의 버스정류장에서 내리자 점심시간이 되어 밖으로 나온 대학생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무거운 등산가방을 진 채로 그들의 사이를 지나가 언덕을 조금 오르니 청송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옆 잔디밭에 아름드리 커다란 나무와 벽돌같이 잘 다듬어진 돌 몇 개가 풀밭에 놓여 있었습니다. 각기 돌들에 나누어져 적혀있는 구절들을 합하면 다음과 같은 말이 완성되었습니다.
“생명은 공평하고 그 자체가 진실입니다. 그리고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일지라도 생명에는 다 존재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술은 생명에 접근하려는 행위입니다.”
≪문학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에게≫ 中
그가 얼마나 생명을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녀의 예술관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죠. 연세대학교 미래캠퍼스에 이 문학비가 세워진 이유는 단순합니다. 1992년부터 집에서 멀지 않은 이 대학으로 출강을 왔기 때문입니다. 문학비에 쓰인 구절이 있는 ≪문학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에게≫는 강의하며 말했던 내용을 정리하여 책으로 낸 것이기도 합니다. 조금씩 내리는 비를 나무 아래 바위에서 피하며 ‘과연 그의 강의는 어떠했을까?’ 생각했습니다. 들어보지 않았던 제가 그 강의를 상상하는 것조차 어렵지만, 적어도 그 강의를 들었다면 박경리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 ‘생명에 접근하는 행위’라는 박경리 작가의 예술에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었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자연의 땅에 붙어 납작 누운 돌들을 침묵 속에 바라보며 그 순간의 자연에 몸을 맡기는 것뿐이었습니다. 제가 한 행위는 작가의 입장에서 생명에 접근하려는 행위였을까요? 모를 일입니다.
대학생들이 많다 보니 대학교에서 원주 시내까지 가는 버스는 제법 많았습니다. 기다린 지 오래지 않아 도착한 34번 버스를 타고 20여 분을 가서 정류장에 내린 뒤 시내를 가로질러 20여 분을 걸어 박경리문학공원에 도착했습니다. 박경리문학공원은 시내의 상가들이 둘러싸인 곳에 자그마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상가 중 가장 인상 깊은 곳은 수원갈비 집이었습니다. 이름이 토지더군요. 갈비집 이름이 토지라니.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토지 갈비집을 지나 박경리 문학공원에 들어서서 가장 먼저 들어간 곳은 박경리 문학의 집이었습니다.
이 박경리 문학의 집은 여러 층으로 되어 있는데 가장 위층인 4층에서는 작가의 거의 모든 작품을 전시해두고 있으며 미리 신청하는 연구자에 한해 모아둔 자료들을 보여주기도 한다고 합니다. 3층에서는 토지의 인물관계도와 줄거리를 보여주고 있으며, 그와 관련된 책과 드라마 작품들을 전시해두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토지의 주 무대가 되는 하동 평사리의 사진을 볼 수 있었는데 대충 보기에 딱 사진이 멋지다는 생각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2층에서는 박경리 작가의 유품과 생전의 사진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제가 자주 본 할머니의 모습부터 제 기억 속에는 없는 젊은 작가의 모습까지. 손주와 같이 찍은 사진들에서는 무척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이 보여 대단한 작가가 아닌 이웃집 할머니가 아닌가 싶기도 했습니다. 무언가 사람 박경리에 한 발짝 더 가까워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보통의 사람들이 알았던 것은 대하소설 ≪토지≫를 지은 대문호 박경리지 딸과 나들이 가서 사진을 찍는 어머니 박경리와 손주와 웃으며 한때를 보내는 인자한 할머니 박경리가 아니었으니까요. 단편적으로만 본 박경리라는 사람의 삶이었지만,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사람의 외양이나 작가 박경리를 두고 한 말이 아닌 한 사람이 그저 다른 사람의 사진에 담긴 삶을 보고 한 생각이었습니다.
박경리 작가의 삶을 사진으로 다시 보았으니 이제 삶의 터전을 볼 차례입니다. 원주에 처음 이사를 올 때 살았던 단구동 주택이 바로 이 문학공원안에 있습니다. 불규칙한 돌들로 포장해 놓은 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꽤 큰 주택이 나옵니다. 원래 이 주변 구역을 재개발하여 이 주택을 없애려 했지만, 시민들이 반대하여 이렇게 공원으로 남았다고 합니다. 참으로 다행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단구동 주택은 들어가 보지는 못하고, 주변 정원과 텃밭을 잘 볼 수 있었습니다. 도시 내의 주택이라 그런지 매지리의 생가 주변보다 정돈된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아기자기한 것을 좋아하는 작가의 성향은 이곳에서도 그대로 느껴졌습니다. 이 옛집은 관리하기 어려워서인지 반려동물 출입금지였는데 고양이를 좋아했던 작가를 생각해보면 고양이가 이 공간에 들어오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뭐, 길고양이들은 알아서 들어오겠지만요.
그리고 이제 문학공원을 한 바퀴 돕니다. 좁은 문학공원 곳곳은 ≪토지≫의 배경을 형상화한 정원들로 가득합니다. 차분히 한 바퀴를 돌고 나면 공원의 한 가운데, 평사리 들판을 형상화한 곳과 마주하게 됩니다. 처음에 볼 때야 아무것도 모르니 그냥 그렇구나 하고 봤지만, 나중에 하동 평사리에 실제로 갔을 때는 이곳을 생각하며 웃음을 지었습니다. 대하소설의 압도적인 경관을 그렇게 귀염뽀짝(?)하게 만들어놨으니 안 웃을 수가요. 원주에서 박경리 작가를 찾는 기행은 이곳에서 마무리됩니다. 박경리 작가의 출생지인 통영과 토지의 배경이 된 하동에서 또 만나게 되지만, 그것은 나중으로 넘기도록 하죠.
원주에서 만난 박경리 작가는 제 기대와는 달랐습니다. 대단한 사상을 가지고 엄청난 재능으로 글을 써 내려간 대문호가 아니었습니다. 책을 좋아했던 평범한 학생이 재능을 발견하여 등단하고, 먹고 살기 위해 악착같이 글을 썼다는 조금은 현실적인 이야기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현실적인 이야기가 그의 평을 내리는 데 영향을 주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조금 더 사람 대 사람으로 정겹게 다가왔습니다. 고양이를 사랑하고 거위와 식물들을 마당에서 기르며 손주를 아끼는 인자한 할머니. 딸이 고생하는 걸 보지 못하고 원주로 내려오는 따뜻한 마음씨의 어머니가 그런 이야기들 속에 담겨 있었고, 교과서나 평론들에서는 볼 수 없었던 사람 박경리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작가가 마지막 28년의 세월을 보냈던 이곳 원주에는 작가의 삶의 흔적과 숨결들이 곳곳에 남겨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행 첫날 저는 이것을 정면에서 맞닥뜨리고 나서야 저는 교과서의 작가가 한 평범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음을 뼈저리게 실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