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因緣

사찰기행-장흥 보림사2

by baekja

불교에서 자주 쓰는 인사법이 있습니다. ‘인연이 닿으면 언젠가 또 보지요.’와 같은 말입니다. 여기서 인연은 무슨 뜻일까요? 인은 세상이 굴러가는 조건을 연은 그 조건으로 인해 당연하게 벌어지는 상황을 말합니다. 이 의미에서 저 말을 풀이하자면 세상이 흘러가는 와중에 우리의 각자의 상황이 또 맞아떨어진다면 다시 한 번 보자는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좀 무책임한 인사처럼 들릴 수 있지만, 이번에 우리가 인연이 닿았으니 다음에 또 안 닿으리란 법이 없다며 다음을 기약하는 긍정적인 인사로 들리기도 합니다. 어찌 됐든 초록창에 동승탑과 서승탑이 지도에 나오지 않은 것도, 제가 비가 억수로 쏟아짐에도 포기하지 않고 동승탑과 서승탑을 찾아 관광안내소의 문을 두드린 것도, 거기서 받은 큰 친절에 그 어느 때보다 따스한 남도의 정을 느낀 것도 다 인연이 아닐까 싶습니다.


비가 쏟아지는 와중에 관광안내소의 문을 웬 배낭여행객이 두드리자 관광안내소의 아주머니들은 당황하신 듯했습니다. 그 와중에 우산을 쓰고 동승탑과 서승탑의 위치를 묻는 대학생이라니. 평범한 사람은 아니라 생각했겠지요(물론 이 글을 쓰고 있는 저입니다.). 하지만, 물었으니 당연히 대답이 나왔습니다. 관광안내사께서는 동승탑은 일주문을 나가 왼쪽으로 조금만 가면 있는 승탑밭에 있다고 하였고 서승탑은 마을 쪽으로 거의 4km를 가야한다고 하면서 일단 동승탑을 갔다 오고 서승탑을 가고 싶으면 길을 제대로 알려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장대비를 뚫고 4km를 왕복하면 버스 시간이 아슬아슬하겠다 싶어서 일단 동승탑을 갔다 와서 생각해보기로 하였습니다.


동승탑으로 가면서 앞의 유치천을 조금 살펴보기로 하였습니다. 수달서식처라는 유치천으로 내려가려는데 사람이 얼마나 안 다녔는지 거미줄 천지더군요. 군대 이후로 간만에 거미줄을 한바탕 뒤집어쓴 저는 크게 당하고 눈으로만 유치천을 보고 올라왔습니다. 유치천으로 쭉 이어진 하천이 앞의 골짜기까지 이어져 이 산골짝에도 논을 만들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었습니다. 이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대대손손 살아오신 분들은 모두 유치천의 은혜를 입었겠지요. 유치천 앞으로 펼쳐진 골짜기를 눈에 새기고 동승탑으로 향했습니다.


동승탑은 별로 멀지 않은 곳에 있었습니다. 가지산 비자림으로 향하는 입구에 있었는데 몇 단의 돌계단 위로 몇 기의 승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습니다. 돌계단에 승탑들은 상당히 불규칙적으로 듬성듬성 있었는데 사라진 승탑들을 모두 합치면 볼만 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원래 있었던 승탑들을 상상으로 채워 넣고 나니 보림사의 예전 사세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해남 대흥사보다 규모가 컸을 것이라는 예상이 들더군요. 서승탑에도 승탑이 모여 있었음을 예상하면 보림사의 규모가 원래는 이 산 주변을 모두 포함하고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갖가지 모양의 승탑 중에서도 눈에 확 들어오는 승탑이 있었는데 바로 한눈에 동승탑임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약간 기울어 있었지만, 나말여초의 승탑임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단아한 승탑이었습니다. 풀로 덮인 듬성듬성 비어있는 보림사의 승탑밭을 뒤로하고 관광안내소로 다시 향했습니다.


아무래도 동승탑의 승탑밭을 보면서 느낀 점이 있다 보니 서승탑도 꼭 가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일단 앞뒤 가리지 않고 관광안내사께 말씀을 드렸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차키를 꺼내와 데려다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얼떨떨한 저는 남도에 온지 3번째로 차를 얻어 타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는 SUV였고, 두 번째는 세단이었는데 세 번째는 경차였으니 종류별로 다 얻어 타본 셈이 되었습니다. 차를 타고 서승탑으로 가는데 비를 뚫고 걸어갔을 생각을 하니 끔찍하더군요.


원래는 유치초등학교 보림분교의 뒤에 있다던 서승탑은 보림사의 암자에서 관리하는 중이었습니다. 보림사의 암자가 이 승탑들을 관리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산촌에 학생들이 없어 분교가 폐교된 것은 매우 안타까웠습니다. 한국 촌락의 빠른 고령화를 눈으로 보는 순간이었습니다. 쨌든 서승탑을 보기 전에 암자에 계신 스님께 인사를 드렸습니다. 차를 마실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했지만, 안타깝게도 스님의 손님이 오셔서 그것은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렇게 인사를 하고 이제 관광안내사께서 본격적으로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균형이 잘 잡힌 안정적인 미감을 자랑하는 고려중기의 승탑이라는 예상했던 설명과는 다른 설명이 귀에 들어와 당황했지만, 흥미롭게 듣기 시작했습니다.


시작은 보림사가 불타게 된 경위였습니다. 유치면은 지리산과 같은 산골로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들이 이곳에서 많이 활동했습니다. 빨치산들은 산골에 자리하면서 밤마다 내려와 절에 먹을 것을 달라고 협박했으며 낮에는 국군들이 식사 제공을 요구했습니다. 보통은 이렇게 시간을 두고 만날 일이 없지만, 종종 만나면 사찰 경내에서 전투가 일어났습니다. 이것을 증명하는 것이 보림사의 승탑들에 나있는 총탄 자국입니다. 이런 전투가 계속되고 사찰을 통한 빨치산들의 연명이 계속되자 사찰의 모든 건물을 태우라고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이에 보림사는 어쩔 수 없이 모든 건물을 태웠고 결국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라 합니다. 지리산에 있는 화엄사도 똑같은 처지에 놓여 있었지만, 건물 한 개만 태우는 속임수로 사찰 건축물의 대부분을 보존했다고 합니다. 한국전쟁 때 불에 탔다는 백과사전의 내용을 상세하게 알게 되자 보림사에 얽힌 현대사의 비극이 더욱 생생하게 다가왔습니다.


비극을 일으킨 이념의 갈등이 무엇인가 고민하는데 다음은 조금 더 가벼운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승탑이 기울어진 이유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사실은 아니고 전해내려 오는 가벼운 전설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스님도 사람이다 보니 오랜 시간 수행을 하면서도 고향을 그리워했을 것이라면서 죽고 나서도 고향을 못 잊어 승탑이 고향 방향으로 숙인 것이라고 하더군요. 여우가 죽을 때 자신의 고향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는 이야기가 문득 떠올라 지성체는 무엇이나 자신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갖는 것인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암자로 찾아가 스님과 작별인사를 하고 보림사로 돌아가 설명을 더 듣기로 하였습니다. 그렇게 스님과 인사를 하는데 저에게 이런 말을 하시더군요. ‘인연이 닿으면 또 보겠지요.’ 저는 무어라 답변해야할지 몰라 ‘안녕히 계세요.’를 말하고 돌아섰습니다. 이 말을 듣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인연이란 말에 대해 매우 고민했습니다. 과연 나와 스님의 인연은 더 닿아 있는 운명일까? 아니면 아무도 알 수 없는 변칙적인 것일까? 그 인연을 내가 만들어갈 수 있는 것일까? 짧은 시간동안의 여러 질문에 답변을 내리지 못한 채로 차에서 내려 다시 보조선사의 승탑이 있는 곳으로 향했습니다.


여기서 또 하나 재밌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보조선사 체징을 헌안왕이 보림사에 머물게 한 이유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헌안왕은 장보고의 사위로 장보고의 권력이 사실상 정점에 달했을 때의 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헌안왕은 그런 장보고에 대해 부담을 느꼈고 장보고 권력의 근거지인 완도의 청해진을 견제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근처의 장흥에 이미 명성 높은 스님이며 가지산문을 잇고 있는 체징을 보림사에 위치시켜 세력을 키우고자 했던 것입니다. 보림사의 세력이 늘어나는데 어떻게 무력이 강한 청해진을 견제하느냐고요? 당시 절들은 세력이 커질 경우 자체 무력집단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보조선사 체징 정도의 인물이 오면 어느 정도의 무력이 갖춰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거기에 보림사뿐만 아니라 가지산문의 세력이 보림사 휘하로 들어가게 되니 청해진은 보림사 때문에 충분히 부담을 느끼게 될 것이었습니다. 명성 높은 종교 지도자가 정치적인 이유로 보림사에 머물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헛웃음이 절로 나왔습니다. 참으로 종교의 이상은 멀고 현실의 이익은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식물에 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는데 비자가 무엇인지 알게 된 것이 가장 큰 소득이라 하겠습니다. 관광안내사께서 땅에 떨어진 비자를 주워 주셨는데 냄새가 상쾌하고 톡 쏘는 것이 매우 신기했습니다. 비자는 병충해를 막고 구충제의 효과가 있어 사찰 내에 심은 경우가 많다고 했습니다. 비자나무 하나가 심어진 것에도 이유가 있다는 것이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더 당황한 것은 야생차를 알게 되었을 때였습니다. 보조선사 승탑 뒤의 풀들이 모두 야생차라고 알려주셨는데 전날 다산초당에서 본 풀들과 같았습니다. 하마터면 다산에서 차를 못보고 왔다고 말할 뻔 했으니 저의 무식함이 다 탄로 날 뻔했습니다.


새로운 이야기들을 다 듣고 버스가 오기까지 한 시간이 넘게 남아 관광안내소에 들어가기로 하였습니다. 관광안내소로 가던 도중 갑자기 차로 가시더니 컵라면을 집어 들으라고 하시더니 같이 밥이나 먹자고 말하셨습니다. 처음 보는 배낭여행객에게 밥까지 챙겨주시다니요. 다시 한 번 남도의 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관광안내소에는 행정업무를 담당하시는 분이 한 분 더 계셨습니다. 나이 지긋하신 할머니의 느낌이 들었는데 말하는 것은 매우 정정하셨습니다. 그 분은 그 자리에서 자기가 싸온 도시락까지 꺼내셨습니다. 잡곡밥에 남도의 묵은지와 잰 김이 들어있는 도시락이었습니다. 오늘 아침을 안 먹었다고 하니 자신들은 아침 먹었다면서 김에 밥과 묵은지를 싸서 주시는데 어찌나 감사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첫 김밥을 입에 넣는 순간 남도 묵은지의 강한 맛이 올라오며 남도의 정까지 제 마음속으로 후벼 파고 들어와 눈물이 찔끔 날 뻔했지만, 참았습니다. 비를 잔뜩 맞고 고생한 끝에 먹는 김밥과 컵라면만큼 맛있는 것이 있을까요? 그렇게 가벼운 점심식사를 끝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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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사투리에 관한 이야기가 가장 먼저 인상적이었습니다. 전라도 사투리가 가장 한국어에 가깝단 이야기였습니다. 전구도 한자어인데 전라도 사투리로는 불알이라고 하니 고유어만 써서 한국어에 가장 가깝다고 말하셨습니다. 간신히 웃음을 참고 있었는데 긴 불알이 형광등이라는 얘기에서는 그만 터져버렸습니다. 거기에 머시기와 거시기까지 구사하시는데 안 웃을 수가 있어야지요.


그 후엔 다음 목적지를 물으셨습니다. 제가 광주라고 하자 다음엔 장흥에 오래 머무르라면서 역사를 전공한다고 했으니 해동사를 한 번 가보라고 추천해주셨습니다. 해동사는 유일하게 안중근 의사만을 모신 사당이랍니다. 왜 해동사가 장흥에 있는지를 물으니 안중근 의사의 성씨인 순흥 안씨에서 분리되어 나온 죽산 안씨의 집성촌이 장흥에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저런 내용까지 다 알고 계신지 경이로울 정도였습니다.


다시 이야기가 돌아와 왜 광주를 가냐고 물으셨습니다. 5.18 유적지를 보기 위해서라고 답하자 한 번 잘 살펴보라고 하시면서 자신들이 5.18을 겪은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제일 나이가 많으신 분은 5.18에 사이렌이 울려 재빨리 집합한 이야기를 하시면서 당시의 시국이 꽤나 급박했음을 말하면서도 절에서 연등 만들다가 뛰쳐나가 꼴이 우스웠다면서 농담을 섞으셨습니다. 관광안내사분은 자신의 남편이 경상도 사람이라면서 5.18당시 전라도로 놀러왔다가 차에 찍힌 경상도 지역을 보고 군인들이 빨리 전라도를 빠져나가라고 말해주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당시에도 이미 지역감정이 상당했음이 확 와 닿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두 분이 모두 공감하는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광주로 가는 전화선이 모두 끊겨 광주에 친척이 있는 사람들은 장흥군 검찰청에 하나 있는 무선전화로 안부를 물으러 가 난리도 아니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광주민주화운동이 광주만의 기억이 아닌 남도 전체가 공유하는 기억임을 크게 깨달은 순간이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역사를 아니라고 치부하는 것도 참 웃기다고 생각하며 시계를 들여다보는 순간 갈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짐을 천천히 챙기는데 가면서 먹으라고 주머니에 자두까지 쑤셔 넣어 주시더군요. 가장 나이 드신 분이 이 힘든 시기에 배낭만 매고 사찰을 돌아다니는 일을 불교에서는 만행이라고 한다며 무사히 깨달은 바를 얻고 집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의 인사는 역시 ‘인연이 닿으면 또 보자.’라는 말이었습니다. 저는 저의 만행이 아마 깨달음에 닿지는 못하겠지만, 저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어주신 두 분께 깊이 감사를 드리고 마지막 인사를 하며 꼭 인연이 닿으면 윤회하여 다음 생애라도 그 은혜를 갚겠다고 속으로 깊이 다짐하고 비가 억수로 내리는 주차장으로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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