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
두 병사가 있습니다. 그들의 동료들은 죽었고, 서로가 적임을 인지한 채입니다. 둘은 서로의 얼굴을 모릅니다. 각자의 참호에서 숨어서 대치하고 있을 뿐입니다. 간간이 총을 쏘고, 긴장 상태에서 겨우겨우 밥을 먹습니다. 둘 다 가족이 보고 싶습니다. 서로는 서로를 괴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자와 아이들을 밥 먹듯이 죽이고, 생명체를 존중하지 않는 괴물. 하지만, 최후의 최후까지 몰려서야 그들은 서로의 참호로 침투하여 진실을 마주합니다. 나와 대치하고 있던 것은 괴물이 아니라 사람이었고, 서로를 괴물이라고 인식하게 한 윗사람들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요. 그들은 가족이 매우 보고 싶고, 집에 가고 싶습니다. 전쟁을 끝내기 위해 서로에게 화해의 메시지를 담은 플라스틱병을 던집니다.
전쟁 혹은 갈등은 서로를 마주 보지 못할 때, 서로에게 공감하지 못할 때 일어납니다. 서로에 대한 편견으로 시작한 갈등은 서로를 다치게 함으로써 멈출 수 없는 폭주기관차처럼 서로의 끝으로 달려 나갑니다. 하지만, 서로의 삶을 보면 모두가 인간이고, 사랑을 알고, 우애를 알고, 평화를 알고 있습니다. 당연한 사실을 누군가는 전혀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속내가 검기에 남의 속내도 검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야기에 나온 두 병사가 더 안타까운 것은 누군가의 검은 속내에 의해 세뇌된 사상을 가지고 남을 대한다는 것입니다. 자의가 아닌 타의로 지금 앞의 사람을 보고 있는 것이죠. 많은 것을 잃었지만, 그들은 다행히 타의가 가린 안개를 벗어나 자의로 앞이 사람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안개는 너무 오래 병사의 눈을 가렸기에 병사는 지금 자기 눈으로 보는 것조차 믿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너무 지쳤기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그들은 이 갈등을 끝내고자 현 상황을 마주합니다. 갈등은 쉽고, 평화는 너무나 어렵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이 안개 낀 타의를 자의라고 생각하거나 자의로 자기 눈을 안개로 가려버립니다. 안개 낀 세상에서 나와 반대에 있는 사람은 적입니다. 무찌르고 없애야 할 적. 서로의 이해가 동반된다면 충분히 협력할 수 있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안개 안에서 주먹질하다가 안개 너머로 보이는 적에게 극단적인 것들을 꺼내 듭니다. 욕설과 주먹을 넘어선 총과 칼. 조금의 억압으로 할 수 없다면 더 큰 억압을 가져옵니다. 그리고 이런 방식은 더 큰 저항을 가져옵니다.
아주 당연한 사실입니다만 사람들은 이 내용을 잊곤 합니다. 안개 안에서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바라보고 한쪽은 내가 좋아하는 내 편, 한쪽은 내가 싫어하고 무찔러야 할 적으로 생각합니다. 글쎄요. 세상이 그렇게 단순하면 얼마나 좋겠습니다만 우리가 조금 세상을 살아본 것만으로도 쉽게 알 수 있듯이 세상은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복잡하고, 어지럽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나라의 주인이라는 민주주의는 차악을 선택했습니다. 모두의 권리를 최소한으로라도 보장하기 위해 어떤 것을 실행하기에 앞서 무수한 검토와 절차를 거치게 했습니다. 좋은 정책을 실행하더라도 막힐 수 있지만, 나쁜 정책을 막기에도 편합니다. 그래서 현재 많은 이들은 많은 나라에서 채택한 대의 민주주의를 차악의 정치라고 합니다.
이 차악의 정치를 최선의 정치로 만들기 위해서는 모두가 동등하다는 관점을 명확히 알고, 서로 공감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생각을 논리적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안개를 걷어내고 서로를 마주한 채 적과 적의 싸움이 아닌 사람과 사람의 연대로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너무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그럼에도 자기 삶이 존중받기를 원한다면 남의 삶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에 다 같이 이 어려운 길을 걸어가야만 합니다.
어려운 길이 괜히 어려운 길일까요? 대한민국에서 똑똑하고 능력 있다는 국회에서도 이러한 것은 보기 쉽지 않습니다. 일단 자기 당의 말이 아니라면 안개부터 눈에 집어넣고 반대하고 봅니다. 정말 짜증나고 보기도 싫지만,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 손으로 뽑은 국회의원인데요. 민주주의의 선 안에 있는 한 몇 마디 비판할 수는 있어도 그들을 몰아낼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는 비판만으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자신의 안개를 몰아낼 생각은 안 하고 주먹질만 열심히 하다가 결국 총과 칼을 꺼내 들었습니다.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생명권을 수없이 앗아갔던 그 총과 칼을 말이죠. 모두가 안개 속에서 서로를 비난하고 욕할지라도 앞에 있는 이들이 사람이라는 것을 알 정도로는 안개를 덜 끼워 넣었지만, 그 사람은 아니었나 봅니다. 세상의 무수한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잘 알 필요가 있고, 부끄러움과 반성을 배워야 한다지만, 그 사람은 좀 많이 배울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이제 그 사람에게 제대로 물어봐야 할 차례입니다. 그러면서 안개를 걷어내 주어야겠죠. 어렵겠지만, 총과 칼에 죽었던 많은 이를 생각한다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당신만이 옳을 수는 없답니다. 안개를 걷어내고 다시 세상을 바라봐요. 당신은 어떤 사람이고, 당신의 적은 정말 실재하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