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여름>
요즘 세상은 내 편이니 남의 편이니 하는 말로 시끄럽습니다. 내 말에 동의 안하면 적이고, 내 말에 동의하면 동료인 단순한 말들이 오고 갑니다. 고작 한 사안의 동의와 거부로 사람을 나눌 수 있다면 참 편리하겠죠. 이런 이분법적인 구분 방식은 무척 편리하고, 효율적으로 만듭니다. 다만, 이런 이분법적인 구분 방식은 늘 문제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유대인이면 다 나빠.’로 시작된 홀로코스트 ‘제주인은 전부 빨갱이야.’로 시작된 4·3사건 등등. 역사 속에서 단순한 이분법적 사고 방식은 사람을 효율적이고 쉽게 죽이는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수많은 사건이 있었음에도 세계 최선진국이라는 미국에서는 여전히 사람을 두 가지로 나누고 있었습니다. 흑인과 백인으로요. 이번 동화는 그 당시의 이야기입니다.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난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1960년대 미국은 흑인들의 인권운동과 그것을 막으려는 백인들의 싸움으로 한창이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백인들이 흑인들을 싫어하지 않았고, 모든 흑인들이 백인들을 싫어하지는 않았죠. 그 중에는 흑인과 백인이 친구가 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존 헨리와 조가 그렇습니다. 조의 집은 흑인에 대한 거부감이 없습니다. 존 헨리의 어머니는 조의 집에서 일하고, 존 헨리와 조는 가장 친한 친구죠. 그 둘은 흑인을 인정하지 못하는 몇몇 사람들의 눈을 피하며 같이 신나게 놉니다.
둘의 모습은 무척 단순합니다. 놀 친구가 있기에 같이 놀 뿐입니다. 고작 피부색 하나 차이로 사람을 나누는 어른들과는 다른 순수한 단순함입니다. 어른이라는 것은 많은 것을 경험했고, 알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들은 어린이들이 모르는 것을 알고 있고, 경험했기에 세상을 자신의 틀에 가둡니다. 그 틀은 세상을 이해하는 쉬운 창구가 되지만, 틀에 벗어난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불편한 것이 되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다릅니다. 어른들이 가르쳐주기 전까지 아무것도 모르기에 세상을 일단 바라봅니다. 세상이 만든 기준과는 달리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이런 아이들의 행동은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린 어른들은 생각조차 못하는 것이기에 어떤 어른들은 아이들의 행동에서 배움을 얻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어른은 그 행동들이 아무것도 몰라서 하는 행동들이라고 생각하죠.
그런 잘난 어른들에게 물어볼 차례입니다. 당신들이 만든 세상은 어떻습니까? 당신들이 바라본 틀에서 만들어진 세상은 괜찮나요? 별 것 아닌 것으로 사람을 갈라치기하고 고작 몇몇 자원 때문에 사람의 목숨이 벌레 목숨만도 못해지는 전쟁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사람을 죽이면 안된다는 아주 단순한 도덕적 관념도 지키지 못하는 당신들을 어른이라고 할 수 있나요? 어른의 행동 논리는 무척 복잡하다고 얘기하지만, 종종 아이보다 유치하고 단순합니다. 어른은 아이보다 많이 알고, 많이 경험했을지언정 대단한 사람은 절대 아닙니다.
조와 존 헨리는 흑인들도 공공시설을 이용할 수 있게하는 공민권법이 발표된 것을 듣습니다. 그리고 수영장에 같이 가자고 약속하죠. 공공 수영장을 쓰는 것을 보기 싫었던 백인들은 그 수영장을 어떻게 했을까요? 그 수영장에 아스팔트를 부어버립니다. 이 일은 아이인 존 헨리와 조에게 큰 상처를 남기죠. 이 아이들은 여기서 좌절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친구를 믿고 서로 어깨동무한 채 나아갑니다. 매번 조가 아이스크림을 사오다가 같이 아이스크림 가게로 들어가는 장면은 이 동화의 백미입니다.
어른들은 너무 많은 것을 알고 그것을 실행할 능력도 있습니다. 당장 다음 날부터 흑인들이 공공 수영장을 사용할 것을 알고 아스팔트를 부어버립니다. 정말 아는 것을 잘못 사용한다는 것은 이런 행동을 말할 때겠죠. 그들의 지식과 경험은 이미 아집이 되어버렸습니다. 아이들은 그 아집에 다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친구로서의 유대가 있기에 그들은 멈추고 돌아서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는 것을 택합니다. 친구가 중요하다는 단순함만을 알고 있는 아이들이기에 어른들은 택하기 힘든 행동을 스스럼없이 행합니다. 그들의 어깨동무는 평생 그들이 같이 앞으로 나아갈 것임을 암시합니다.
여전히 인종차별은 중요한 문제입니다만, 많이 해소되었습니다. 아이들의 순수함을 간직하고, 자신의 앎과 경험을 제대로 활용할 줄 아는 어른들에 의해서 차별은 점차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차별은 많습니다. 그리고 차별을 해소하는 과정에서 다른 집단을 차별하기도 하죠. 여전히 전쟁도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어른들이 살아온 세월에서 만들어진 깊은 감정의 골은 해소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 감정의 골은 사람을 더욱 단순하게 만들죠.
그래도 이런 말을 하고 싶습니다. 이왕 단순해질 거라면 정말 단순해져보는 것은 어떨까요? 내 앞에 있는 사람은 나와 ‘다른 사람’이기 전에 일단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 집중해보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 눈에는 이데올로기나 사상 같은 색안경이 벗겨지고, 앞의 멋진 사람이 보일 겁니다. 그리고 대화해보고 같이 놀다보면 이 사람이 나랑 안 맞을 수는 있지만, 괜찮은 사람이고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그렇게 하나하나 해결하다보면 세상은 좀 더 괜찮아지지 않을까요? 그렇게 괜찮아진 미래의 세상에서는 존 헨리와 조처럼 아이들이 눈치를 보며 친구와 놀아야하는 상황은 사라질 것입니다. 유대감과 평화가 가득한 그 세상을 꿈꿔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