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 글
4주 전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온 저는 상한 바나나를 먹었습니다. 지쳐 있었는지 시큼한 맛이 났는데 아무 생각 없이 먹었습니다. 시큼한 바나나라니.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저는 어딘지 나사가 빠져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배가 아프기 시작하고 한 시간 만에 묽은 대변이 나온 후에야 그게 상한 바나나였던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로 그 배탈이 낫느라 고생을 한 탓에 이미 꽤 지쳐 있던 저는 그냥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올해 여름 방학 초부터 계획했던 사찰기행을 떠날 때가 지금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망할 이 속세의 번뇌와 고민, 내적 갈등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만이 들었습니다.
여행이란 일상에서 벗어나 떠나는 것이지요. 가서 새로운 것들을 보고 경험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며 여러 가지 대화를 하기도 합니다. 분명 계획 없이 떠나는 여행에서도 이러한 것들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뭐가 됐든 저는 사찰기행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이 여행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계획을 짜기 시작했습니다. 절들을 하나씩 찾아보며 어딜 갈지를 고민했죠. 첫째 날 논산 관촉사, 둘째 날 남원 실상사, 셋째 날 구례 화엄사, 넷째 날 해남 대흥사, 다섯째 날 강진 무위사, 여섯째 날 장흥 보림사로 결정이 났습니다. 이렇게 짜고 나니 자가용 하나 안 쓰고 농어촌 버스로 저런 산사들을 가는 게 상당한 무리라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제가 이 절들에 대한 사전조사를 했는지를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전혀 안 했더군요. 그러자 이 여행을 계획했던 첫 계기가 떠올랐습니다. 부석사를 보았던 때였습니다. 부석사를 보고 그 아름다움에 놀라고 행복해하며 제가 가보지 못했던 절들을 하나씩 찾아가 봐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면서 답사에 가까운 여행을 생각하고 있었지요. 여기에까지 생각이 닿자 그냥 떠나고 싶단 마음과 이번 여행을 무의미한 시간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갈등을 시작했고 결국 이번 여행을 무의미한 시간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승리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주 저는 도서관에서 사찰 관련 책들을 빌려 절들에 관한 내용을 찾아보았습니다. 꽤 오랫동안 접어두었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권도 다시 꺼내 읽었지요. 하나하나 읽으며 글을 마음에 새기고 이미지를 속으로 그리며 여행지의 상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푸르른 남도의 여름. 그 고즈넉한 산에 알맞게 자리 잡은 산사.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다만, 가기 직전이 되자 여행을 떠나는 7월 28일부터 끝나는 8월 3일까지 장마철이라 비를 각오해야 한다는 기상 예보가 떨어졌습니다. 그깟 비가 무슨 대수냐는 생각을 하며 가뜩이나 비 오는 분위기도 좋아하는데 잘됐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만 산으로 찾아가는 만큼 비 대비는 철저히 해야 했기에 백팩 방수 커버를 사서 배낭에 씌우고 우의도 챙기는 등 나름 준비를 했습니다.
6박 7일의 긴 여행인 만큼 빨래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4일 치 정도의 옷만 챙기고 저의 생각을 정리한 다이어리와 사찰 답사기 한 권을 챙겼습니다. 그 외에도 비상약 등등 여러 잡다한 것들을 챙겼습니다. 전철 일호선을 타고 천안역으로 내려가 천안역에서 논산역으로 내려가는 기차를 타는 것이 여행의 시작이었기에 그 기차만 예약을 해두고 논산역에서 남원역으로 가 남원에서 첫날 잠을 잘 것이었기에 남원의 숙소만 예약을 해뒀습니다. 그때부터 설레기 시작했습니다. 혼자 떠나는 긴 첫 여행, 거기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남원, 강진, 장흥 등의 지역이 포함되어 있었기에 미지의 곳을 여행한다는 기대감이 더욱 커졌습니다. 다음날 저는 몸을 일호선에 실었고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 제 사찰기행이 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