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일상-오늘 하루

by baekja

새벽 세시 반까지 근무를 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쉽게 잠들지 못하던 나는 5시가 넘어서야 간신히 잠들었다. 그러다가 깬 건 아침 7시쯤 같은 생활관 내 출근하는 사람의 드라이 소리에 깼다. 위잉위잉 소리가 아주 시끄러웠지만 짜증이 올라오기도 전에 순식간에 사용하고 꺼버려서 어렵지 않게 다시 잠에 들 수 있었다. 다시 일어난 것은 11시쯤, ‘아직 출근 시간이 남았네.’라고 생각하며 바로 다시 잠에 들고 결국 일어난 것은 12시 10분. 일어나서는 점심을 뭘 먹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식단을 알 수 없었던 나는 과감히 라면을 선택해서 간식을 파란 박스에서 봉지 짜파게티와 컵라면인 불닭볶음면과 무파마를 꺼내 먹었다. 늘 해왔던 대로 짜파게티와 불닭볶음면을 섞어먹고 무파마의 진한 국물로 입가심을 하고나서 출근 까지는 시간이 꽤 남은 것 같아 사지방에 가서 컴퓨터를 켰다. 컴퓨터 시간은 12시 42분. “출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네.”라고 혼자 중얼거리면서 페이스북만 스윽 살펴보고 바로 이를 닦고 옷을 갈아입고 출근했다.


근무에 들어가니 다행히 별 특이사항이 없어 안심하며 잠시 앉아 있다가 청소해야할 개집을 떠올렸다. 날씨가 차서 배도 차졌는지 요새 개들이 설사를 죽죽 뿌려서 개집이 엉망진창이었던 어제 모습을 떠올리니 더 이상 앉아 있을 수 없었다. 핫팩과 무전기를 챙겨 밖으로 나가자 생각보다 추웠다. 반갑게 정문 근무자들과 인사를 하고 개집으로 들어가자 예상했던 대로 엉망진창. ‘시간도 많은데 그냥 천천히 하다보면 끝나겠지.’라는 느긋한 마음으로 옷을 갈아입고 개들을 꺼내주었다. 개들을 내보내고 다시 바라본 개집 바닥은 참혹 그 자체. 똥 반 오줌 반. 허허 웃으며 천천히 물을 뿌리고 솔로 변자국을 지워내기 시작했다. 군생활 동안 몇 번이나 했을지 모를 솔질을 계속 반복하다보면 말 그대로 나중 가서는 기계가 된다. 평소엔 싫어하지만 오늘만큼은 나쁘지 않았다. 조용한 공간에서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는 느낌이었다. 겨울의 차가운 공기 속에 느껴지는 평온한 침묵. 사람도 전자기기도 하나 없는 이곳은 마치 산속 절의 작은 암자와도 같은 느낌을 주었다. 별 생각 없이 청소를 하다 문득 이러한 침묵이 어색해서 개들을 묶어둔 곳으로 가보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올 겨울 내가 보는 첫눈이었다. 사실 눈이 내린다고 하기도 뭐했지만 하나씩 하나씩 달팽이보다도 느린 속도로 떨어지는 눈 몇 송이는 그 존재만으로 풍경을 바꿔놓았다. 차가운 공기가 따뜻해지고 침묵 속에 쓸쓸해하던 모든 풍경에 아름다움을 더하는 그 눈 몇 송이를 마음속에 깊게 담고 청소를 마무리 한 후 시린 손을 후후 불어가며 다시 근무지로 향했다.


근무지는 히터가 틀어져 있어서 따뜻했다. CCTV를 보러 가기 전까지는 딱히 할 일이 없어 다음 주에 있을 출장 관련 서류나 좀 만지면서 시간을 흘려보냈다. 얼마 안 지나 CCTV를 보는 자리로 올라가 앉아서 그저 CCTV나 보다가 심심해져서 후임에게 되도 않는 농담을 건네기 시작했다. “심상정 의원이 안건을 상정했는데 그 안건이 심상치 않아.”, “해태가 해태 아이스크림을 먹었더니 빙그레 아이스크림을 먹었을 때보다 더 빙그레 웃더라.” 등. 옆에 앉은 후임의 곤란한 표정을 즐기는 나는 아마 되먹지 못한 사람일 테지. 하하. 뒤에서 듣다 못한 다른 후임이 뽁뽁이를 쥐어주면서 이거나 터트리라기에 심심했던 나는 군말 없이 집어들고 하나씩 터트리기 시작했다. 몇 년 만에 쥐어보는지 모르는 뽁뽁이는 생각보다 나름 재밌었다. 하나씩하나씩 터트리는 쾌감이 있달까. 아무것도 안 남는 CCTV보다 성취감이 있는 일이어서 1시간 내내 그것만 붙들고 있게 되었다. 좀 있다 보니 저녁 시간. CCTV를 다보고 교대로 밥을 먹기로 했다. 혼자 식당에 앉아 밥을 먹고 있는데 조금 있으니 급양 특기 후임들이 와서 말을 걸기 시작했다. 한 후임이 밴드를 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이후엔 음원 스트리밍 사재기에 대해 이것저것 얘기했다. 그리고 다시 CCTV보는 곳으로 올라가 뽁뽁이를 터트리면서 그저 앉아 있었다. 몇 분쯤 지났을까 지루한 화면이 점점 어두워지고 화면의 세세한 부분들이 점점 잘 안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서 화면은 빛으로 가득 차 버렸다. 선으로 찍히는 눈의 모습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정적인 화면에 운동감을 가득 부여했고 이내 화면을 거의 가려버렸다. 행복했다. 딱히 애정이라고 생길 일 없는 사계절 내내 똑같은 철조망이 전부 가려지자 아름다운 빛의 선들이 자유롭게 화면에 떠다니기 시작했다. 그렇게 즐겁게 그 율동을 지켜보니 금세 퇴근할 시간이 되었다. 이것저것 업무 내용을 다음 크루인 후임들에게 전달하고 퇴근했다.


무난한 하루 일과가 끝나고 지금은 아이유의 <시간의 바깥>이라는 곡을 들으며 이 글을 쓰고 있다. 무척 그리고 아주 무난해서 쓸쓸한 겨울의 하루였음에도 꽤 행복했다는 생각이 들고 있다. 아주 무난하고 평범했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오늘만의 경험들이 내 새로운 추억으로 남을 것이라는 생각에 기분이 좋다.


아마 지구 어디에서는 70억 사람들의 행복을 빌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럼 나는 이 글을 보여주고 이렇게 말할 거 같다. 당신이 빌어준 덕에 나는 오늘 하루 행복했다고. 당신의 오늘 하루도 무난하고 평범하지만 그 속에는 새롭고 빛나는 경험들이 가득한 그런 행복한 하루였기를 바란다고. 그 김에 이 쓸 데 없는 신변잡기적인 이 글을 끝까지 읽어준 여러분을 위해서 하나도 믿지 않는 신을 향해 빌어볼 생각이다. 오늘만큼은 여러분의 하루가 행복하기를. 만약 그렇지 못했다면 앞으로의 하루는 늘 행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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