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는 차가 많이 다니지 않습니다. 섬에 살 수 있는 인구는 한정되어 있고 관광객들 또한 비행기나 배로만 들어올 수 있기 때문에 한 기간 내에 섬에 머무를 수 있는 인구는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출퇴근 시간 제주시와 서귀포시 중심을 제외하고는 차가 막히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뻥 뚫린 해안도로를 달리는 드라이브가 제주 여행의 묘미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합니다.
여행 내내 걸었던 제 입장에선 딱히 드라이브를 즐길 일을 없었습니다. 해안도로를 지날 때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속도감 있게 휙휙 지나가는 바다를 보기 보다는 걸으며 느긋하게 경치를 보곤 했죠. 느긋하게 걷다보니 그저 앞만 보고 걷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모든 환경을 둘러보며 걷는 습관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아래, 위, 앞, 뒤, 왼쪽, 오른쪽까지. 걸음은 조금 느려졌지만,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면서 무척 즐거웠습니다.
경관이 좋은 해안도로든 사람이 없는 조용한 오솔길이든 걸으면서 이곳저곳 보다보면 무척 새로운 느낌이 들었지만, 가장 새로운 느낌이 든 것은 해안도로 안에 있는 일주도로를 건널 때였습니다. 제주의 해안도로 안쪽에는 제주를 한 바퀴 돌 수 있는 일주도로가 있습니다. 도심지를 벗어나 있을 때 간혹 일주도로를 건너야 할 때가 있습니다. 차량 하나 보이지 않는 시골에서 길게 뻗어져 있는 길의 존재는 무척 신기합니다. 차가 없다보니 여유 있게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처음으로 앞만 보고 가는 게 아니라 양옆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전에 없던 경관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인도와 차도로 나누어진 현 세상에서 횡단보도는 무척 이질적입니다. 인도와 차도를 가로지르는 길이며 항상 다니는 것이 정해져 있는 인도나 차도와는 달리 초록불일 때는 인도가 되고 다른 때에는 차도가 되는 신기한 길입니다. 차도를 가로지르는 목적지향적인 길이고 건너는 시간이 정해져 있는 촉박한 느낌을 주는 길이기에 우리는 횡단보도 위에서 양 옆을 볼 생각을 하지 않고 그저 앞만 보고 갑니다. 어쩌면 양 옆을 보더라도 차에서 보는 경관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처음 인식하고 본 횡단보도 위의 처음 보는 풍경은 몹시 새롭고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날도 3시에 세 끼를 몰아먹은 후 침대 위에서 지쳐 쓰러져 있었는데 저녁이 되자 그날 조금 힘들었는지 배가 꺼지면서 배가 고프더군요. 나가기 귀찮았지만, 노을 진 하늘도 구경하고 먹거리도 좀 사기 위해 숙소를 나갔습니다. 숙소에서 조금만 걸으면 일주도로가 나왔고 횡단보도를 건너면 편의점이 있었습니다. 마침 차도에 차가 없기에 초록불 신호에 횡단보도를 여유 있게 건너면서 차도로 쭉 뻗은 붉은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무척 아름다웠습니다. 쭉 뻗은 길과 그에 평행하게 늘어서있는 야자수. 그리고 그 위를 화려하게 꾸미는 노을 진 하늘까지. 생애 처음 본 광경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신호에는 한계가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건너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다지 바쁘지 않은 저는 몇 번이고 횡단보도를 다시 건널 수 있었죠. 처음으로 건너야만 하는 길인 횡단보도를 새로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길로 인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풍경을 바라본 이후 저는 한 가지 습관이 생겼습니다. 횡단보도를 건널 때 앞만 보고 가지 말고 양 옆을 둘러보는 습관입니다. 제주 구도심에서도, 서귀포 신시가지에서도, 서울에 가서도, 제 집에 와서도 누가 길가다 보면 이상해 할 일을 반복했습니다. 하지만,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전에 다녔던 길임에도 전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풍경이 계속 나타났으니까요. 새로운 풍경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 원래 보이는 풍경에도 새로운 풍경이 숨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어 지루한 일상에 색을 더해주었습니다.
여전히 저는 가끔 길을 걷다 여유가 없어 숨이 막힌다는 생각이 들면 횡단보도 위에 서서 양 옆의 풍경을 둘러봅니다. 그 찰나의 순간 앞으로만 가야한다는 강박은 사라지고 시야가 넓어지며 마음에 약간의 여유를 되찾게 되죠. 그럼 마냥 지루하고 짜증난다고 느꼈던 일상이 조금 즐거워집니다. 일상에서 제주올레 여행처럼 매일 새로운 것을 맞닥뜨릴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주변을 새롭게 보면서 여유를 찾는다면 즐겁지 않은 일상에서 조금은 즐거움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