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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올레 완주기-오름

by baekja

제주도 여행을 가서 이곳저곳 돌아다니다 보면 동네마다 뒷동산처럼 봉긋 올라선 오름들을 손쉽게 볼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형태를 가진 오름들이 제주의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늘어서 있는 모습은 장관이죠. 깊고 깊은 산맥이 둘러싼 첩첩산중의 느낌을 주는 한반도의 산맥과는 색다른 느낌을 주어 신기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새롭고 웅장한 느낌을 주는 오름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오름은 크게 두 가지 의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큰 화산 옆쪽에 붙어서 생긴 작은 화산인 기생화산을 말합니다. 흔히 과학시간에 한국의 화산 지형에 대해 배울 때 이 정의를 배우죠. 그래서 보통은 이런 의미로 오름을 알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오름’이라는 제주도 사투리에 대해 살펴보면 오름은 조금 넓은 의미로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주도는 한라산을 ‘두무오롬’, ‘가메오롬’ 등으로 부르고 있었습니다. 두무는 위가 둥글다는 뜻으로 가메는 솥뚜껑을 뒤집어 놓은 모습과 닮았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남은 단어인 ‘오롬’ 즉, 오름은 그냥 산을 지칭하는 제주도 방언인 것입니다. 기생화산뿐만이 아닌 모든 산을 제주도 방언으로 오름이라고 지칭하는 것이죠. 이후에 오름을 해석하여 이름을 붙이면서 현재 오름들이 ‘봉, 악, 산’이라는 각각 다른 명칭을 갖게 된 것입니다.


제주올레길을 걸으면서 만나는 무수한 오름들을 여기서 다 설명하기엔 역부족이고 추억이 남은 오름들을 골라 설명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식산봉입니다. 사실 식산봉을 가보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2코스 초반의 오조리 바닷길과 이어지는 식산봉이 철새도래지였기 때문입니다. 자세히 말하자면 제주도에 온 겨울 철새들에게서 조류 인플루엔자가 발견되어 철새도래지의 출입이 금지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철새 도래지에 가면 종종 방역복을 입고 새들의 분비물들을 모으는 분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코로나 시대에 다른 바이러스로 입는 방역복을 입는 모습은 몹시 새로웠습니다. 새로운 풍경을 보기는 했지만, 결국 식산봉을 가지 못해 2코스는 미완의 여로가 되어버려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아쉬움이 있기에 이후에 더 큰 즐거움을 맛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식산봉을 멀리서 바라보고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20210108_104548.jpg 멀리 보이는 식산봉


오름은 철새도래지와 같은 자연의 보금자리가 되어주기도 하지만,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 되어주기도 합니다. 대표적으로 신서귀포 시가지 뒤에 자리 잡아 서귀포시민들의 좋은 산책길이 되어주는 고근산(孤根山)이 있지요. 근처에 산이 없어 외롭다는 데서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다고 하네요. 어쨌든 고근산은 표고 해발 396m로 대부분 해안가를 따라 걷는 올레길에서 가장 높은 곳이기도 합니다. 서귀포 시가지 바로 뒤에 있기 때문에 이 높은 곳에서 바다와 함께 서귀포 전체를 조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간 날은 비가 내려 안개가 온통 끼어 있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서귀포시민의 사랑받는 산책로라는 곳에 사람하나 없고 바람만 불어서 으스스한 느낌만 들었습니다. 올레길에서 가장 공포가 느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귀신에 쫓기는 듯이 정상에서 급하게 내려왔지만, 나중에 날씨가 좋은 날 가면 느긋하게 경치를 즐겨보고 싶습니다.


고근산과 마찬가지로 7-1코스에 자리한 오름이 있습니다. 고근산이 산책이라는 삶의 질을 높여주는 터전을 마련해주는 오름이라면 이 오름은 살기 위해 없으면 안 되는 식량을 생산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주는 오름입니다. 이름부터 큰 논이라는 뜻을 가진 한논의 변용인 하논이죠. 하논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는 마르형(Marr) 분화구라고 합니다. 마르란 화구의 규모에 비해 분화구 바깥을 두르고 있는 산의 높이가 낮은 화산을 말합니다. 5만여 년 전부터 땅 속 마그마가 솟아오르다 지하수와 만나 증기 폭발한 후 오랜 시간에 걸쳐 퇴적층이 쌓이면서 화구호 형태의 분화구가 만들어진 것이죠.


백록담보다 큰 하논 화구에서는 지하에서 용천수가 올라오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물을 모아 논농사를 지을 수 있는 제주에서는 보기 드문 곳이죠. 아마 제주올레길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넓은 논일 겁니다. 병풍처럼 둘러싼 산들 아래에 펼쳐진 넓은 논을 봤을 때의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논을 그토록 보기 힘든 제주도에서 확인함으로써 어떠한 문화적 동질감까지 느껴지더군요. 하지만, 16세기 전부터 논농사를 지으며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던 마을이 4.3사건 이후 소개령이 내려져 잃어버린 마을이 되었다는 설명을 보고는 조용히 빗방울 떨어지는 논의 모습에서 쓸쓸함이 느껴졌습니다.


20210201_123759.jpg 하논분화구


앞에 말한 오름들은 사람들의 손을 많이 탄 오름들이지만, 지금 말할 오름은 사람들의 손을 별로 타지 않아 길이 무척 험한 오름입니다. 9코스에 자리한 월라봉은 길이 무척 험합니다. 아슬아슬한 절벽 사이로 난 좁은 길을 조심조심 올라야 하지요. 월라봉 정상에 어렵사리 오르면 화순리와 멀리 산방산이 보일 뿐 반대편의 대평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 험한 월라봉과 월라봉 옆의 박수기정이 장벽이 되어 대평리는 고난이 계속되는 제주 역사에서 큰 화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제주 인구 30만 명 중 약 3만 명이 직접적인 피해를 받았던 제주 4.3 사건의 불꽃이 대평리에 닿지 않았던 것이 대표적이 예입니다. 하나의 오름을 경계로 화순리와 대평리의 운명이 갈린 것이지요. 길어야 걸어서 두 시간 정도면 닿을 수 있는 각 마을의 역사가 극적으로 달라졌음을 생각하면 인간이 역사를 써내려가지만, 역사의 향방은 알 수 없음을 통감하게 됩니다.


사람이 손길이 거의 닿지 않은 월라봉과 달리 10코스의 송악산은 그 유명세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들의 손길이 너무 많이 닿아서 문제인 오름입니다. 그래서 제가 갔을 당시 자연휴식년제에 따라 송악산 정상 탐방로는 출입이 통제되고 있었습니다. 조금 아쉽긴 해도 자연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당연한 조치라고 생각합니다. 보호해야할 만큼 귀중한 송악산의 수려한 자연 경관도 제 눈길을 끌었지만, 저는 아직도 송악산 초입의 현수막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송악산일원 문화재지정 규탄한다.’라고 송악산 근처에 사는 주민들이 걸어 높은 현수막이었죠. 문화재지정을 하면 개발이 힘들어지고 개발이 힘들어지면 경제적 가치가 당장에는 떨어지니 주민들로서는 반대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당장의 경제적 가치가 아닌 미래를 생각한다면 당연히 송악산이 가진 소중한 자연과 그 가치를 생각해봤을 때 모두에게 이득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강하게 문화재지정을 하라고 지정할 수 없는 것은 문화재지정이 되었을 당시 경제적 가치를 넘어 주민들이 겪는 고충이 꽤 많기 때문이겠죠. 어떤 방식으로 논의가 이루어지든 송악산의 대체 불가한 자연 경관만큼은 유지되기를 바라며 씁쓸한 마음으로 송악산에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20210117_114640.jpg 송악산에서 바라 본 바다


보통 해안가를 따라 걷는 올레길 특성상 올레길 주변에 있는 오름들은 바다와 함께 훌륭한 경관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바닷가에서 시작해서 중산간 지역에서 끝나는 13코스의 마지막에 자리한 저지오름은 오름이 가지고 있는 숲만으로도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합니다. 저지오름의 숲은 2007년 ‘제8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되었습니다. 다양한 나무들과 풀들이 터널과 같은 길을 분화구를 따라 만들어 자연의 기운을 만끽할 수 있게 합니다. 나무들과 풀들에 의해 시야가 좀 가릴지언정 겨울에도 가득한 녹빛의 숲은 마음에 안정과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원래는 초가집을 덮을 때 사용한 새(띠)를 생산하던 곳이었으나 주민들의 힘으로 나무를 심어 이토록 아름다운 숲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분화구 테두리를 따라 숲을 즐기며 걷는 둘레길은 무척 즐겁고 재밌지만, 저지오름의 경사가 꽤 가팔라 분화구 위까지 가는 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래서 저와 친구는 저지오름 산책로 옆에 무거운 가방을 내려두고 저지오름을 한 바퀴 돌고 왔습니다. 날씨가 좋아 저지오름을 지나가는 사람이 많아 보는 눈이 많기도 했지만, 꽤 오랜 시간 저지오름을 구경하고 왔는데도 가방이 그대로 있더군요. 남의 물건이 방치되어 있을 때 함부로 가져가지 않는 대한민국의 문화에 가슴 따뜻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20210121_132432.jpg 저지오름 숲길


고근산이 서귀포시민들의 산책로라면 제주시민들의 산책로는 사라봉입니다. 고근산보다 높이 위치하고 있지는 않지만, 조금 낮은 높이가 오히려 접근성을 좋게 하고 더욱 친근한 느낌을 들게 합니다. 제주시내를 관통해 빠져나가는 18코스의 초입에 있는 사라봉의 정상에 서면 제주공항의 비행기가 지나가는 것이나 제주항의 배가 지나다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역동적인 현대 제주의 모습을 느낄 수 있는 곳이죠. 사라봉(紗羅峯, 沙羅峯)에서 바라보는 제주 시내의 모습도 좋지만, 가장 아름다운 것은 이미 19세기 매계(梅溪) 이한우(李漢雨)가 지정한 영주십경(瀛州十景)의 제2경 사봉낙조(紗峯落照)로 지정한 사라봉의 낙조입니다. 저는 일몰 때 사라봉을 가보지 못해 보지 못했지만, 무척 아름답다고 하니 제주 시내에 머무를 일이 있으시다면 꼭 한 번 보기를 추천하겠습니다.


20210128_092044.jpg 사라봉에서 바라본 제주항

마지막으로 소개할 오름은 제주올레길 마지막 코스인 21코스에 위치한 지미봉(地尾峰)입니다. 지미봉은 이름에서부터 ‘땅끝’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지미봉의 반대편인 한경면에는 땅의 시작이자 머리라는 의미인 두모리(頭毛里)가 있죠. 사실 지미봉은 무척 아름답다거나 거대하다거나 특별한 무언가가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땅의 끝이라는 의미가 주는 무게감이 있습니다.


제주목사가 부임하고 도는 첫 순찰의 경로와 마찬가지로 제주올레길은 시흥리에서 시작한 여정은 지미봉이 위치한 종달리에서 끝나게 됩니다. 지미봉을 지나 해안길을 걸어 종달리 백사장에 도착하면 하염없이 넓은 바다가 수고했다며 어깨를 두드리는 느낌이 납니다. 안타깝게도 일정 변화 때문에 21코스가 마지막이 아니었던 저는 이러한 느낌을 온전히 받지는 못했지만, 지미봉의 이름에서부터 다가오는 끝난다는 느낌은 아직 올레길을 완주하지 못했던 저에게도 벅찬 느낌을 주었습니다. 그리 특이할 것은 없었음에도 지미봉이 여전히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올레길의 대단원을 장식하는 오름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20210107_114451.jpg 지미봉


제주의 오름들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왔습니다. 삶의 터전이 되어주기도 하고 이런저런 자원이 되어주기도 했습니다. 여행객들 또한, 오름들을 통해 평소에는 보지 못한 아름다운 경관을 보고 잊지 못할 경험을 얻어가기도 하지요. 이렇게 오름과 사람이 엉켜서 살아가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오름에게 많은 의미부여를 합니다. 그러한 과정이 오름의 외부 모습과 이름, 그리고 여태까지 이어져 온 인간과 오름의 삶의 형태에서 고스란히 드러나지요. 그저 오름만 보고 지나가면 모를 수 있는 이런 오름의 깊은 이야기들은 올레길을 걸으며 사람과 만나고 오름을 지나 오름과 연관된 마을들에 머물면서 하나씩 알아갈 수 있었습니다. 제주올레길에서 제가 오름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듯 이 글을 읽고 제주올레길에서 오름과 만날 분들도 오름의 깊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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