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용 트렁크가 조금 비싸도 되는 이유
트렁크에 최소한의 나의 집을 담고 있다
여행을 앞두고 가방을 채우다 보면 '내'가 보인다. 짐을 싸면서 머리는 늘 같은 말을 한다. '간소화 하자, 최소한의 짐만 챙기자... 필요하면 현지에서 사면되고, 현지에서 사고 싶은 물건들을 채울 공간을 최대한 만들어가야 한다, 무엇보다도 짐이 무거우면 가는 동안 이미 지쳐 여행지에서 컨디션 난조를 겪을지도 모른다.'
트렁크에 짐은 일상에서 내가 꼭 필요하다 생각하는 것들의 순위를 알려주는 듯하다.
누군가의 트렁크에는 약이 차지하는 비중이 컸고, 누군가들은 옷이기도 했으며, 누군가들은 식거리였다.
나의 트렁크에는 화장품과 목욕용품들이 늘 꽉 찬다. 과하다 싶어 다시 짐을 풀고 보면 아무리 봐도 뺄게 하나도 없다.(여행을 할수록 한국 화장품을 대체할 만한 다른 나라 제품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여자의 화장품이란 것은 어느 하나가 빠져 아쉽기 시작하면 나머지가 아무리 많아도 그 하나의 빈자리를 대신할 수가 없으니, 그 하나를 단념하기까지 마음속 번민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나의 변명은 한결같다. "내가 일 년 내내 여행만 하는 여행가라면 이럴 필요가 없지. 다시 돌아와야 하잖아. 얼굴을 엉망으로 만들어 오면 회복하는데 세네 배의 시간이 걸린다구."
트렁크 속의 짐을 보며 난 여행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여행은 분명 일상을 떠나는 일이며 사람들은 그 일 앞에 흥분하면서도 일상을 또 최대한으로 구현할 최소한을 고스란히 들고 가고 싶어 하는구나.
무너지면 안 될 일상의 마지막 영역을 이렇게 지고 다니는구나.
인간을 정의하는 많은 학명들이 있다.
최근에 '걷는 자, 떠도는 자'로서 정의된 인간의 속성을 읽어본 적이 있다.
곰곰이 나의 경우를 비추어본다. 일상에서 내가 가장 자주 하는 말은 "여행 가고 싶다"일 것이다. 그런데 돌아올 나의 집이 없다고 가정하면 그 느낌은 사뭇 달라진다. 돌아올 곳이 없는 '여행'은 없다. 그것은 '부랑'이다. 내가 여행을 고대하고, 부모님이 항상 걱정을 하는 그 떠남을 틈만 나면 강행하는 데는 돌아올 집이 있음이 전제되었기 때문이다.
트렁크를 보면 그런 느낌이 더욱 커진다. 최소한의 내 집을 여기에 담고 있다.
트렁크를 이고 지고 각지의 공항과 여행지를 누비는 사람들을 보면 그래서 난 달팽이가 떠오른다.
또한 트렁크의 힘은 위대하다.
여행 끝이 무척이나 아쉽지만 그 끝에 난 무사히 여행이 끝났음에 늘 감사드린다.
집에서 출발할 때 함께 떠난 트렁크가 또 나와 함께 집에 도착하는 그 순간은 내게 감동으로 다가온다.
좋은 공항을 만났든, 말도 안 되는 공항을 만났든 짐을 부치고 찾고 옮겨 다녔던 모든 시스템과 그 과정들이 그저 장하다.
대만 반차오를 여행할 때였다. 도시는 전반적으로 깨끗했는데 길에 바퀴벌레들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나라 환경과 비추어볼 때 쉽사리 적응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그곳 바퀴벌레는 유독 뒷다리 두 개가 길어서 마치 앞다리가 잘린 듯 밸런스가 맞지 않아 뒤뚱대며 기어 다녔다.
여행을 마치고 타오위안 공항에 도착해 기내에 반입되지 않는 물건을 트렁크에 옮겨 담으려는 순간 트렁크 바퀴에 죽은 바퀴벌레가 붙어있는 게 아닌가.
이미 죽어있던 건지, 내 트렁크에 치어 죽은 건지 난감하고 끔찍했다.
난 짐의 체크인과 운송의 모든 과정에서 그것이 자연스레 처리될 것을 기대하고 그냥 그 채로 보내버렸다. 공항에 도착 후 택시를 타고 아파트 현관에 도착해 트렁크를 눕히자 떡하니 아직도 붙어 있는 바퀴벌레.
이렇게 함께 떠난 내 작은 집, 트렁크는 무엇하나 소실되지 않고 심지어 소실되길 원하는 것까지 그대로 챙겨 나와 함께 집에 도착하였다.
여행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오는 일은 늘 깊은 아쉬움이 있지만 이 돌아올 일상이 있으므로 난 또 언제든 기회가 된다면 행복하게 여행길에 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