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그것은 더할 나위 없는 상태

여행은 나를 알아가는 시간

by 피카타임

여행을 하면서 나는 나를 보게 된다.
낙엽이 가득 떨어져 있는 초록 잔디밭.
현지인들이 사는 골목에 위치한 커피숍.
그들의 슈퍼마켓이나 재래시장.
사람들이 메인으로 찾지 않는 바다.
주거지의 원색 페인트.
내가 여행지에서 만나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들이다.
나는 사고 체험하고 먹는 것보다 주로 풍경을 좋아하는구나...
유명 관광지보다 현지인들이 생활하는 그들의 삶터를 좋아하는구나...


여행지에서 저 풍경을 마주하면 난 '행복'을 느낀다.
분명 행복한 감정이다.
행복이란 더할 나위 없는 상태, 그런 감정을 의미하는 거라 생각한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것이 다르고 상황도 다르고 보편적으로 우리의 마음은 끝없이 무엇인가로 채우길 원하지만,
찰나든 비교적 긴 시간이든 살면서 분명 더할 나위 없는 상태를 만나게 된다.
무더위 속에 갈증을 해결할 아이스커피를 마시며 때론 그럴 수 있을 것이다.
하기 싫은 과제에 며칠을 싸여있다가 해결되는 그날이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잃어버릴뻔한 소중한 사람을 되찾는 순간도 그럴 것이며,
지긋지긋한 사람과 헤어짐도 그럴 수 있겠다.

생각해보면 사소하고도 자주 일어나는 이 상태의 감정이 행복이다.
그러니 한 번도 행복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도 없을 것이고, 그렇다고 한결같이 행복하기만 한 사람도 없 것이다.
(인생은 무언가가 채워지면 반드시 다른 문제에 직면하도록 되어있으므로)

여행 속에서 난 이 더할 나위 없는 상태를 자주 경험한다. 나열해놓고 나니 얼마나 사소한 풍경들인지... 큰 이야깃거리도 없다. 그럼에도 내 마음을 꽉 채운다.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기엔 보이는 것보다 더 분명히 느껴지는 존재이다.
어떤 날들은 날 공허하게 한다.
바다보다 더 깊고 다양했던 마음이 정말 파도에 쓸려나가듯, 혹은 모래시계 속 모래가 다 떨어지듯 훅하고 무언가가 다 빠져나간 것처럼 공허함이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다시는 무엇으로도 마음이 채워지지 않을 거라 생각하지만 막상 그 마음이 채워지는 건 찰나의 순간이.
찰나의 풍경 혹은 찰나의 만남 찰나의 풍미 속에 다시 또 밀물처럼 마음이 채워진다.

여행은 이러한 순간들을 얼마나 많이 선사하는지... 쓸려 나갈 틈 없이 마음을 또 채우고 또 채우고...
여행지에서의 시간은 주로 이런 행복의 감정들이 지배한다.
날 채우는 사소한 풍경들은 여행지 도처에서 나를 부르기 때문이다.

식물을 좋아하는 나에게 싱가포르에서 꼭 가봐야지 했던 곳은 '보타닉 가든'이었다.
그곳엔 한국과 다른 습성의 기후에 사는 식물들이 많다고 들었다.
마지막 날 일정이어서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여러모로 시간 분배에 신경을 썼다.
보타닉 가든의 입구를 이십 분 정도 남겨둔 어느 골목.
와우. 휘황찬란한 가옥들이 펼쳐진다.
나중에 찾아보니 유명인들도 많이 사는 부촌이라 했다. 그들의 집을 구경하는 일에 벌써 마음이 풀려 버렸던 것 같다. 부촌의 진귀한 경험이 끝나자 보타닉 가든을 코앞에 두고 동네에 제법 큰 슈퍼마켓을 만났다. 늘 그렇듯 저절로 그곳으로 발걸음이 향했다. 한국에서도 여행지의 이런 마켓들은 항상 내 발길을 사로잡는다.
과일 베이커리 다양한 고기들 치즈 공산품 등등...
하나하나 사소한 차이들에 큰 의미를 두며 마켓을 둘러보는데 마음이 또 더할 나위 없는 상태가 됐다. 보타닉 가든이 머리에서 점점 지워지고 있는 줄도 모른 채,
풍채 좋은 싱가포르 아줌마가 권하는 치즈를 종류별로 시식하며 거기 사는 현지인처럼 이것저것 식품들도 꽤 바구니에 담았다.


그 마켓이 특별히 날 사로잡았던 건 크리스마스 분위기였다.
이제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건 한국의 문화로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지만 그래도 무언가 허전하다. 그냥 우린 우리대로의 모습으로 그 시즌을 즐기고 있는 것이지,
어린 시절 동화나 영화 속에서 보았던 크리스마스의 분위기가 도무지 나지를 않는다.
추석과 설의 문화를 어느 나라에서 흉내 낼 수 있을 테지만 우리의 그 정서까지는 다 재현하는데 무리가 있을 수 있듯 크리스마스도 그런가 보다.


싱가포르는 겨울나라가 아니어서 싱그런 초록 가로수가 가득한 거리의 크리스마스 장식은 좀 어색한듯 하더니 이곳 마켓의 크리스마스는 아니었다.
크리스마스 장식들과 케이크들, 그것을 웃으며 고르는 가족들, 그리고 잔잔히 흐르는 캐럴.
난 그 마켓의 분위기에 빠져서 홀로 그곳에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한 것 같다.
한국의 대형마트에 비하면 턱없이 작은 그 마켓을 구석구석 돌고 또 돌고 물건들을 보고 또 보는 동안 시간이 얼마나 지나있던지 결국 보타닉 가든에 가질 못했다.
코앞에 유명 관광지를 두고 동네 마켓과 바꿔치기를 해버다.

돌아와 보타닉 가든에 대해 생각해보니 미련은 남지만 실제로 가보지 않은 곳이라 두 번은 생각나지 않았다.
그 대신 사진도 겨우 두장밖에 없는 그 마켓은 두고두고 떠올라 그때마다 날 행복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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