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넷신문에 기고하기 위해 준비했던 열다섯번째 이야기
2015년 12월 22일 K구단에 첫 출근을 하였다. 당시 K구단은 수도권 대도시 중심부에 있는 15층 건물의 꼭대기 층에 세들어 살고 있었다. 출근시간인 오전 9시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런데 뜻밖에도 3~4명의 구성원만이 눈에 띄었다. 60명이 족히 쓰고도 남을 책상들이, 거의 모두 비어 있었다.
왜 다들 출근을 하지 않았을까? 신임사장이 온다고 알고 있을 텐데, 왜 다들 자리에 없을까? 알고 보니 시즌을 치루는 연중에는 구성원들이 휴가를 쓸 수가 없어서, 12월에 대부분 휴가를 쓴단다. 또한 시즌중 구성원들의 연장근무가 많다 보니까, 구단도 12월중순부터 2주정도 문을 닫는단다. 공교롭게도 구단이 쉬는 시기에 내가 부임한 것이다.
나의 프로야구단에서 첫날은, 이렇게 일반 회사와 다른 느낌으로 시작되었다. 부서장들을 중심으로 꼭 필요한 사람들만 회사에 출근해서, 나의 업무 인수인계를 도왔다. 그렇게 부지런히 프로야구단의 업무를 습득해가던 어느 날, 구단주로부터 미팅을 하자는 연락이 왔다.
일주일 후 구단주를 찾아갔다. 구단주의 비서가 나를 회의실로 안내하였다. 책 몇 권이 꽂힌 책꽂이와 한쪽 벽에 걸린 자그마한 화이트보드가 회의실 장식의 전부였다. 굉장히 심플하게 꾸며진 방이었다. 5분쯤 지났을 무렵, 구단주가 회의실에 들어왔다. 그리곤 웃으면서 인사와 함께 가벼운 질문을 던졌다.
“출근한 지 얼마 안되었지만, 팬으로 응원하던 프로야구단과 내부에서 경영을 해야 할 프로야구단은 많이 다르죠?”
팬으로서 바라보던 프로야구단은 경기와 선수가 전부였다. 하지만 프로야구단도 엄연히 하나의 기업이어서, 야구 경기라는 서비스를 만드는 과정과 이것을 매출로 연결시키는 과정이 있다. 팬은 프로야구단이 제공하는 최종 서비스만을 볼 수 있기에, 실제 프로야구단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업무는 상당히 다를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프로야구단이 생성해내는 서비스가 일반적인 회사와 많이 다르기 때문에, 평생을 일반 회사에서 생활해왔던 나에게는 더욱 더 생소할 수밖에 없었다.
구단주는 내가 빨리 프로야구단에 적응해서, 새로운 시즌을 잘 이끌어주기를 바랬다. 그래서 나의 soft-landing을 도와주기 위해서, 숙제를 내주고 싶단다.
“야구를 좋아해서 간혹 경기를 보기는 했겠지만, 2015시즌 K구단의 144경기를 하이라이트가 아닌 full version으로 전부 시청해보세요.”
나는 이해가 안되는 눈으로 구단주를 쳐다보았다. 야구 한 경기는 보통 3~4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144경기를 전부 보게 되면, 대략 500시간 전후가 필요하다. 사장으로 업무를 보면서, 어떻게 500시간이 넘게 시간을 만들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자 구단주는 내가 의문을 갖는 것을 이해하겠다는 듯이, 설명을 덧붙였다.
“144경기를 시청하면, 야구 경기를 이기기 위해 활용되는 전략이나, 투구나 타격, 수비 행위에 대한 전문적인 식견을 쌓아갈 수 있어요. 경기를 구성하는 이러한 요소들을 이해하는 것이, 프로야구단의 비즈니스 모델을 이해하는 첫걸음이 되겠죠.”
내가 2017년 K구단 주변으로 이사하기 전까지는, 출퇴근 시간이 보통 1시간 이상 소요되었다. 그래서 출퇴근 시간을 이용해서, 2015시즌 K구단의 144경기를 시청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출퇴근 시간만으로는 부족해서, 업무시간 중간중간에 경기를 봐야만 했다. 그리고 경기를 보면서 궁금했던 것들을, 야구선수 출신인 프런트 구성원들에게 끊임없는 질문을 해댔다.
“왜 선수들이 슬럼프에 빠지고, 이것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서 어떤 노력들을 하나요? 감독이 왜 원 아웃상황에서 희생번트 지시를 내렸나요? 저 투수는 왜 실점위기에서 슬라이더를 구사했나요?” 등등등…
이렇게 144경기를 시청하는 동안 나도 모르게 야구의 투구, 타격, 수비에 대한 기술적인 지식이 쌓여갔다. 이후 시즌을 치루면서, 투수와 포수, 그리고 야수와 타자의 움직임을 통해서, 왜 그들이 그 상황에서 그런 play를 했는 지에 대한 이해의 폭을 조금씩 넓힐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선수들이 상황별로 진행하는 play에 대해서, 팬들이 어떻게 반응하는 가를 지켜볼 수 있었다. 팬들은 득점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에 나온 안타나 홈런에 환호하였다. 또한 실점 기회를 무산시키는 호수비가 나왔을 때 응원의 박수를 보냈다. 이렇게 선수들의 play와 이에 대한 팬들의 반응에서 story가 만들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팬들의 기억속에서 추억으로 만들어지게 된다.
패배에 익숙한 야구단은 득점을 만드는 호쾌한 안타나 홈런도, 상대편을 무력하게 만드는 호수비도 잘 나오지 않는다. 어떤 팬들이 이런 야구단을 응원하고, 좋은 추억으로 남기겠는가? 결국 강한 팀이 팬들에게 기억으로 남을 수 있는 좋은 경기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프로야구단 사장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강팀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려면, 선수 선발부터 시작해서 육성, 경기 운영과 훈련 등 모든 과정에서, 다른 팀보다 훌륭한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지속적으로 강한 전력의 선수단을 만들 수 있다. 특정 선수나 코칭스태프들의 개인적인 능력에 의지하게 되면, 강팀으로서 지속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들은 언젠가 프로야구단을 떠날 것이기 때문이다. 프로야구단 사장은 강팀을 만드는 시스템의 구성요소들을 분해하고, 각 요소들의 성공요인을 추출해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을 실행으로 옮길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