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무제표와 기업심사 Part 4

도축장과 정부보조금

by 고니파더

8년전 쯤, 조금 골치 아픈 심사를 맡았던 때의 일입니다.


주니어 심사역 딱지를 막 떼려하려던 그때. 지방에 위치한 도축장 대출 연장 심사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생각보다 담보 규모가 상당했고 여신 금액도 100억을 넘어가는 여신이었죠. 더군다나 난생 처음 보는 도축장.


작은 은행 입장에서 보면 난이도가 상위 1% 안에 드는 대출이라고 볼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 제가 처음부터 신규로 집행한 건은 아니었어요.


기한연장건이라 처음에는 별 생각없이 업무를 진행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대출을 받은 차주사 역시 그동안 이자납입도 큰 무리 없었고 거래도 그럭저럭 잘 해왔습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이 업체가 연장 시점에 증액을 요청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아니 문제라기 보다 진짜 업체의 '문제'를 발견하게 되었다는 말이 정확한 표현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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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찮기는 했지만 이것저것 처음부터 살펴보자는 마음으로 자세하게 파악해 나가던 중에 '국고보조금' 이라는 계정 과목이 우연히 저의 눈에 들어 왔습니다.


참고로 중급회계에서는 '정부보조금' 이라는 계정과목으로 사용되는데 보통 재무제표에는 유형자산의 차감계정으로 기록됩니다.


유형자산을 취득하는 기업 입장에서 보면 정부로부터 지원받는 만큼 해당 금액을 자산에서 빼는 것이죠.


물론 향후에 감가상각비 계상 시 그만큼 감가상각비에서 차감해주는 효과도 있습니다.


자세한 회계처리는 회계사분들께 물어보시고!~


암튼 이 계정과목이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동시에 담보 물건의 건축물 대장을 통해 해당 도축장이 최초 건축 시 국고보조금을 지원받은 사업장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깊은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알고보니 '국고보조금 지원 사업장이 당해 물건을 담보로 제공할 때는 관할 시,도지사의 사전 승인이 있어야 한다' 는 것이 주된 포인트.


눈치 빠른 사람들은 짐작했겠지만 대상 사업장은 지자체 사전 승인 없이 대출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말 그대로 문제가 되어 버린 여신.


왜냐하면 지자체 동의 없이 정부보조금 사업장에 여신을 지원하게 되면 해당 근저당권 설정이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죠.


정말 이 사실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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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심사에 있어서 실수는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으니.


다만 문제는 전임자의 실수를 전면에 드러내지 않고 어떻게 잘 해결해 나갈 것인가에 달려 있었습니다.


저는 당시에 정공법과 변칙 작전을 (?) 동시에 택했는데요.


문제가 있음을 행내에 조심스레 알리는 한편, (이로 인해 각 부서마다 책임 떠넘기기와 해당 이슈에 대한 공치사를 서로 다투는 더러운 모습도 목격하게 되었지만...) 영업점과 차주사를 압박해서 지자체로부터 보조금 사업장에 대한 담보제공 승인 문서를 사후조치의 하나로 받을 것을 추진했습니다.


결국은 이 문서가 문제 해결의 핵심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죠.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모두가 노력한 결과 지자체 사후 공문을 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은 정말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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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끝에 문제가 있는 해당 여신을 정상화 시켰지만 결국 해당 업체는 3년 뒤에 망했습니다.


다만 대출을 취급했던 저희 입장에서는 사전적으로 적절한 조치를 취해서 NPL 매각하는데 큰 이슈없이 정리할 수 있었죠.


가슴을 쓸어내리는 순간이었습니다.


누군가는 이 대출이 부실로 갈 때까지 심사역들이 뭐했냐고 비판하기도 했지만 한 선배는 술자리에서 이렇게 위로해 줬습니다.


'이 심사역. 니가 100억 부실나고 전임 심사역들 모두 쇠고랑 찰 뻔 했던 거, 10억 손실난 거로 마무리 한 것은 정말로 잘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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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이 일로 그 흔한(?) 표창 하나 받지 못했지만, 다친 사람 하나없이 무사히 넘어간 것에 만족합니다.


더불어 교과서로만 배웠던 것이 실제로는 엄청나게 중요하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사실 월급쟁이 직장인에게 일을 통해 새로운 걸 알게 되어 가는 것 만큼 더 가치있는 일이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만, 다시는 맡고 싶지 않은 일로 기억합니다.


이번 글이 부디 계정과목 하나가 실무에서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제대로 설명해주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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