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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시담 Oct 20. 2022

바다와 나

생명의 공간

익숙하지 않은 잠자리 덕에 이른 아침 눈을 떴다.

침대맡으로 나 있는 창문을 열어보니 어스름이 걷히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아침이었다. 창문 밖으로 움직이는 것이라곤 저 멀리 힘찬 날갯짓을 하고 있는 검은 새 한 마리 뿐이었다.

그 날의 모래사장을 처음 밟는 사람이 나이기를 바랐다. 나는 피곤한 줄도 모르고 밖을 나섰다.

바다 바로 옆에 숙소를 잡았던 까닭에 힘들이지 않고 흰 모래사장을 밟는 요행을 누릴 수 있었다.
 

발 아래로 사각사각한 모래의 질감이 느껴졌다. 해변은 마치 오아시스를 담은 사막과도 같아 보였다.

나는 모래 위에 가만히 서서 발 아래 유유자적 그림을 그려내는 밀물과 썰물의 흔적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파도는 무언가에 닿으려는 듯 계속해서 해변을 향해 몸을 던졌지만, 이내 바다로 돌아갔다. 쏴-하는 소리와 함께 그림은 그려지고 지워지고를 반복했다. 그 형상이 때로는 아주 기이하여, 언제였을지 가늠도 하기 힘든 옛날 옛적에 물이 존재했을 수도 있다는 행성의 표면에 깃든 신비로운 영광의 흔적 같기도 하였다. 그 곳에도 이렇게 물의 자국들을 따라 걷던 자가 있었을지를 떠올렸다.    

 

시리게 차가운 모래의 감촉이 두 발을 감싸안았다. 나는 고개를 들어 바다를 내다보았고, 내 시선의 끝이 닿는 곳에서 반짝이는 윤슬들이 시시각각 새로운 그림을 그려내고 있었다. 온통 눈부신 찬란함이었다. 저 찬란함 속에 존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순간 나는 풍덩, 에메랄드 빛 바다에 몸을 내던졌다.

정오가 가까워 왔다. 바다는 더욱 아름답게 빛났으며, 동글동글하고 몽글몽글한 울림이 피어났다.     


‘시원해-!’

물 위에 푸욱 누워 온 몸으로 이 순간을 온전히 느껴보았다. 등에 닿는 차가운 바다의 물결, 손에 스치는 파도의 감촉, 내 위로 쏟아지는 햇살.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의 환희가 일순간 내게 몰려왔다. 그 아찔한 안도감에 나를 힘껏 내맡기는 찰나, 나의 테두리를 맴도는 물결의 인사에 귀가 먹먹해져옴을 느꼈다.

많은 이들을 품어왔을 바다, 그 안으로 나를 위한 공간이 새로이 열렸다.     


처음 배영을 배웠을 때의 그 날이 떠올랐다.

그 시절 내가 가장 좋아하던 시간은 모든 수업이 끝나고 아무도 없는 레인에 누워 좋아하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나만의 세상을 구축하고, 무너뜨리고, 또 화해하는 시간이었다.

두려움 반 호기심 반으로 물 위에 몸을 뉘이노라면, 이 세상과 나 사이에 온연한 무(無)의 공간이 피어났다.

그것은 분리나 해리의 상징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세상과 좀더 단단히 결속하게끔 하는 모순을 선사했다.   

  

인간의 기억력으로는 떠올릴 수 없는 시간들이지만, 태앗적 오로지 나만이 헤엄치고 향유했던 세상의 감촉이 이런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감각이 내 안을 향했고, 그 어떤 것도 나의 평화와 휴식을 방해하지 못했다.     

  

팔 곁으로 기분 좋게 차가운 잔물결이 찰랑였다.

나를 품은 바다가 아주 오래전부터 이곳에 존재했다는 사실에 나는 새삼 경이로움을 느꼈다. 대륙이 생겨나고, 이동하고, 부서지는 그 오랜 세월동안 바다는 계속해서 그 모습을 유지해왔으리라. 그 유구한 세월동안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남자, 여자, 아이, 노인, 개척자, 부랑자, 고뇌하는 자, 창조하는 자, 모든 것을 포기한 자, 희망을 얻은 자.

아주 많은 장면들을 목격하고 함께한 후에야 내게 와 닿았으리라. 그 모든 이야기의 결말을 품에 안은 바닷속을 헤엄치며 나는 바다와 함께 태어나고 소멸했을, 좌절하고 희망을 얻었을 이들의 얼굴을 그려보았다.

떠나온 세계가 더 이상 나의 사유를 잠식할 수 없는 곳까지, 바다는 나를 깊숙이 밀어넣었다.


생명의 환희가 가득찬 그 공간에서, 나는 아주 오래도록 자유롭게 헤엄쳤다.

따사로운 햇살과 날푸른 심해의 곁을 찬찬히, 그러나 힘들이지 않고 들이마셨다. 그리고 마침내 온전한 평화와 함께 육지로 떠밀려왔다. 바닷물의 깨끗한 정기를 온 몸에 뒤집어쓴 채 내 위로 불어오는 바람을 온 힘을 다해 마주했다.     


바다에는 노랗고 붉은 빛의 잔상이 올랐다.

하늘과 바다가 맞닿는 수평선은 태양빛에 작열했고, 바다는 태양이 만들어내는 빛의 커튼에 몸을 내맡긴 채 흐드러지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육지에서의 모든 번뇌가 씻겨 내려간 듯 했다. 나는 다시 태어난 듯 마음이 아주 말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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