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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시담 Oct 20. 2022

젊은 꿈의 초상

초상(初像) : 그것이 처음 태어난 형상

언제 봐도 아름다운 에메랄드 빛의 바다.

해와 구름의 이동에 따라 시시각각 얼굴을 달리하는 바다의 모습은 아무리 오래 지켜보아도 질리지 않을 것 같다.


여행지의 설렘 속에 잠을 설쳤던 나는 커피  잔이 간절했고, 며칠 전부터 눈여겨본 함덕리 인근의 카페에 들어왔다.  앞에 펼쳐진 바다의 웅장함을 내려다 보기에 손색이 없는 장소였다. 무뚝뚝한 표정과 친절한 목소리를 겸비하신 카페 사장님께서는 ‘제주는  햇볕도 무지 하지라고 말씀하시며 나무 아래 그늘진 자리나 실내석에 앉기를 권하셨지만, 오랜만에 마주한 활짝  하늘과 바다를 외면할  없었던 나는 사장님의 만류를 뒤로 하고  트인 야외 테이블에 앉았다.     


땅을 집어삼킬 듯 뜨거운 아스팔트 위로 피어오르는 5월의 아지랑이, 찬란하게 빛나는 바다의 푸른 물결에 나는 온통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어제 저녁 서점에서 구매한 책을 읽기 위해 찾은 카페였지만, 지금 이 순간의 환희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기에 잠시 책을 내려두고 바다를 바라보기로 했다.

일주일 제주살이를 계획할 때만 해도 7일이라는 시간이 짧지 않을 줄 알았는데, 매일 바다를 바라보기에도 부족한 시간이라는 사실을 왜 미처 알지 못했을까. 이 바다를 부족함 없이 마음에 담기 위해서는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세계는 아름답다.

푸른 절벽 위로 아른거리는 열기의 장막과 하얀 백사장 모래알들 위로 쏟아지는 빛줄기, 숨이 멎을 정도로 광활히 펼쳐져 있는 맑은 빛의 바다와 대조를 이루는 검은 현무암, 아직 채 피지 않았지만 특유의 강인함으로 돌무덤 틈바구니에서 거센 바람을 이겨내고 있는 수국, 그리고 이름 모를 풀들까지. 자연을 동경할 수밖에 없는 순간들이 눈 앞에 가득 차올랐다.

굽이진 산등성이는 한 걸음 한 걸음을 주저하며 신중하게 그려낸 한 폭의 유화 같았다. 조심스럽지만 강렬하고, 한껏 힘을 주었지만 과하지 않은 붓놀림의 고결함ㅡ그 모든 것을 자연은, 이 세계는 힘 하나 들이지 않고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내 눈 앞에 펼쳐진 장면들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기 위해 마음 속에 감상을 꾹꾹 눌러담았다. 바다의 색감에서는 잘 풀어놓은 유화물감이 보이는 듯 했다.  울트라 마린, 프러시안 블루, 리비디안 휴, 티타늄 화이트를 층층이 쌓아올린 수천 겹의 유화물감처럼 온전히 청량한 아름다움이었다.


정오의 작열하는 태양과 열기 속에 바다는 제가 가진 가장 아름다운 색채를 뽐내었고, 가장 밑바닥의 깊이까지 관중을 힘껏 끌어당기고 있었다.

무엇이 이토록 아름다운 세계를 창조했으며, 나로 하여금 이를 힘껏 누릴 수 있는 힘을 주었을까.

내가 가지도록 허락된 미약한 재능들로써 눈부신 자연의 환희와 찬사를 이 세상 곳곳, 그것이 채 닿지 못하는 구석에까지 전달하고 싶다는 꿈을 나는 마침내 꾸었다.  


삶의 여정 속에서, 세상과 나를 잇는 연결점이 얼마 되지 않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아 갔다. 늘 어딘가에 속해 있었지만 어쩐지 부유하며 떠돌고 있는 듯했고, 세상이 나를 끌어당기는 중력은 부족했다. 잠시나마 나와 가까워지는 것들은 약속이나 한 듯 나를 맴돌다 떠났기에, 언제이고 사라질 무엇인가를 붙잡기보다는 ‘나’라는 인간 자체로 정의할 수 있기를 바랐으며, 나를 둘러싼 세상과 나만의 연결방식을 추구하기에 다다랐다.     


내 눈 앞에 펼쳐진 아름다움을 글로 써내려가고 그림으로 그려내는 일이 그랬다.

그것들이 자연과 나의 연결고리를 상기시킬 때마다, 가슴에 벅차도록 들어앉은 환희와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불현듯 삶을 향한 열정이 샘솟았다. 마치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인 것처럼, 우습게도 그랬다. 무엇인가를 창조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이 생기고서부터 나의 일상은 충만함과 동시에 결핍되어 있다.  

   

어떤 것이 옳은 삶일까. 나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60이 되면, 지금까지 살아온 햇수를 한 바퀴 더 살아내고 나면, 선망과 동경의 순간들을 만들고 부숴내기를 반복하다 보면, 내가 가진 꿈 근처에라도 도달할 수 있을까.

나의 모습을 빚어내는 길을 나 스스로 선택할 수 있기에 나는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부끄럽도록 날것인 젊은 꿈의 초상을 오늘도 담담히, 찬란한 봄의 화폭들 사이에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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