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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시담 Oct 21. 2022

사랑, <향연>

사랑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 그녀에게는 무수한 조건들이 따라붙었다.


똑똑해야 했고, 착해야 했고, 그녀 자신을 상처주면서까지 남을 배려해야 했다.

그녀의 생각과 반하는 일에도 군소리 없이 따라야 했고, 누구나 사랑할 만한 수려한 외모를 가져야 했다.

이 세상에는 아무런 노력 없이 존재만으로 사랑받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20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녀 자신이 그런 사람일 리 만무했다.

존재만으로 사랑받는 일이 가능하단 사실은 도리어 그녀에게 알싸한 상실감만을 불러일으켰을 뿐, 그 어떠한 위로도, 실질적인 도움도 건네지 못했다.


누군가로부터―가족으로부터, 연인으로부터, 친구로부터, 때때로 그녀 자신으로부터―버림받는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그녀는 항상 ‘내가 사랑받지 못하는 일에 대한 합당한 근거’를 찾으려 했다.

그녀의 눈 속 타인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선하고 옳아보였으므로, 이들이 그녀를 못마땅해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데에는 필시 어떠한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어떻게든 자신을 떠나간 이들을 이해하려 한 그녀의 둘레에 남는 것은 긴 리스트의 ‘사랑받을 수 없는 이유’ 뿐이었다. 그녀 또한 자신에 대한 옅은 연민감은 느낄지언정,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삶은 늘 헛헛했고, 이따금씩 그녀는 세상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음을 느꼈다.

그녀를 땅 아래로 끌어당겨 주는 중력은 그녀 스스로가 가진 고뇌의 무게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기에, 늘 어딘가를 떠도는 듯했고, 안정감을 느끼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일상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쳇바퀴처럼 돌아갔다.

별일 없는, 그러나 조금은 지치는 하루를 보낸 뒤 문을 닫고 텅빈 방에 들어서면 자신의 몸 뉘일 방 한 켠만이 우주의 전부인 양 느껴졌다.

이 세상과 그녀 사이의 모든 접점은 일순간 소멸하는 듯했고, 매일같이 그녀만의 감옥을 짓고 들어갔다. 때로는 세상과의 연결고리가 모두 사라진 듯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소리치고 싶었으나, 그녀의 소리 없는 울부짖음은 허공을 맴돌다 하릴없이 그녀에게 돌아왔다.

늘 스스로가 아슬아슬한 경계선 어딘가에 선 사람처럼 느껴졌다.     


이런 그녀에게도 실낱같은 한 줄기의 희망이 있었다―바로 그녀만을 위해 준비된 반쪽을 찾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녀에게 있어 일종의 종교적 구원 같은 믿음이었다. 그 어떤 의문도, 의구심도 품지 않을 굳건한 믿음.

사랑받는 일을 위한 현실적인 방책들은 늘 그럴듯하게 그녀의 손아귀를 빠져나갔기에, 누군가에게는 비웃음거리가 될지도 모르는 신화적 믿음만이 그녀에게 두 발을 땅에 붙인 듯한 안도감을 주었다.


그녀는 태초에 자신과 함께 빚어진 존재가 잉태의 순간 그녀와 반으로 나뉘며 불완전한 존재가 되어버렸다고 믿었다. 그녀의 반쪽 또한 이 세상 어딘가에서 온전치 못한 몸을 하고 절뚝이고 있으리라, 애타게 그녀를 찾으며 온 세상을 떠돌아다니고 있으리라, 그녀만큼이나 외롭고 아프리라.

거친 파도, 숱한 파랑(波浪)들과 싸우며 지독히 날선 자신을 느낄 때마다, 그녀의 반쪽 또한 지나고 있을 끝없는 침식과 침잠을 떠올리며 두 사람의 결합을 간절히 기다렸다.     


그녀는 함께 있을 때 눈썹 사이에 힘을 주지 않아도 되는 사람을 기다렸다.

심장 가장 깊숙한 곳 은밀히 감춰둔 따뜻한 마음을 건네받았을 때 귀하고 아름답게 여겨줄 사람을, 차갑게 베어버릴 듯한 얼굴로 이까짓 건 아무것도 아니라며 절벽 아래로 내동댕이치지 않을 사람을,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심장소리마저도 나누어줄 사람을.


그렇게 서로를 알아보고 태초의 모습을 이루게 되면, 그녀는 더 이상 홀로 아파하지 않아도 되리라. 힘겹게 절뚝이며 이 세상 저 세상을 표류하지 않아도 되리라. 세상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더 사랑받기 위해 적어두었던,그러나 도무지 쓸모없던 그 많은 조건들을 벗어던지고 그들만의 세상에서 행복을 노래하리라. 안간힘을 쓰지 않아도 초여름의 녹음처럼 기분 좋은 선선함 속에 살 수 있으리라.

그녀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굳건한 믿음이 있었다.


이따금씩 풀벌레 하나 울지 않는 어스레한 밤이 찾아오면, 그녀는 자신의 반쪽도 잠 못 이루며 뒤척이고 있을지, 먼지 자욱한 도서관에 앉아 케케묵은 책들을 읽고 있을지를 떠올려 보았다.

그럴 때면 습관처럼 새끼손가락을 까딱이곤 했는데, 이는 ‘운명의 사람과는 붉은 실로 묶여있다’는 말에 대한 미신적―혹은 낭만적―믿음을 기반으로 했다.

저 멀리서 그녀를 찾기 위해 헤매고 있을지도 모르는 반쪽에게 ‘일어나, 여기야, 어서 나를 찾으러 와’ 하고 작은 신호를 보내는 것이었다.     




제법 무더워지기 시작한 어느 초여름이었다.

언제나 수업시간 10분 전 강의실에 도착하는 그녀였지만, 그날은 난생 처음 늦잠을 자버렸고, 지갑을 두고와 집에 돌아가야만 했고, 지하철마저 연착되었는데, 평소와는 많이 다른 아침에 적잖이 당황한 그녀였다.

헐레벌떡 강의실에 도착했지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교실은 빈 자리 하나 없이 가득 차 보였다.

그 때, 평소라면 절대 앉지 않았을 강의실 맨 끝 자리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강의실에 남은 단 하나의 빈자리였다.

그녀는 ‘내일은 알람을 여러 개 맞추어 두어야겠어’ 라고 다짐하며 오밀조밀 붙어 있는 책상 사이를 볼품없이 허둥대며 가로질렀다.

마침내 강의실 맨 끝 자리에 다다라 자리에 앉으려는 순간, 그녀는 옆자리 남학생의 어깨를 가방으로 살짝 치는 실수를 저질렀다.


당황한 그녀의 눈에 남학생 책상에 놓인 플라톤의 <향연>*이 먼저 들어왔다.

책 모서리가 조금씩 닳아 있었지만, 꽤나 반듯한 모양새였다. 책 내용을 음미하고자 오래도록 여러 번 읽은 듯 보였다.

‘이 수업은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에 대한 수업이 아니었던가?’

그녀는 어떤 생각에 사로잡힌 듯 아주 오랫동안 남학생의 책을 바라보다 자신이 방금 저지른 실수를 떠올렸다.

‘죄송합니다!’

괜찮다며 싱긋 웃어보이는 그의 눈에 말갛게 상기된 그녀의 얼굴이 비쳤다.


그녀는 새끼손가락 마디마디가 저릿하게 아려옴을 느꼈다.





<향연>* : 사랑(에로스)를 다양한 시각, 단계, 맥락에서 주제로다루는 플라톤의 작품.

             ‘인간에 관한 환상적 이야기’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인간의 본래 상태가 둘로 나뉘어졌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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