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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시담 Oct 22. 2022

속초

그녀의 별난 취미 중 하나는 주말 아침 눈을 떠 속초바다로 떠나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수년전 그녀와 도통 어울리지 않는 애인과의 연애에서 생겨난 습관이었다. 마음이 갑갑할 때마다, 이 연애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옥죄는 마음이 들 때마다 그녀에겐 숨쉴 곳이 필요했다.


집에서, 서울에서, 이 지긋지긋한 다툼에서 두 시간 반만 달려나가면 바다가 있었다. 무엇 하나 뜻대로 할 수 없었지만, 바다를 보는 일에만큼은 그녀의 의지가 충실히 닿았다. 티켓을 구매할 때마다 짜릿한 해방감이 일었다.

결국 끝없이 반복되는 속초여행은 취미라기보단 스스로를 위해 내린 처방약과도 같았고, 속초라는 지명은 그녀에게 여행지보단 치유의 공간에 가까웠다.


속초를 방문할 때면 늘 같은 서점을 찾았다. 제법 큰 독립서점이었는데, 이 서점 한 켠에는 방문객들의 글을 전시하는 재미난 코너가 있었다. 꽤나 많은 글들이 벽면을 차지했고, 매번 새로운 글들이 생겨나고 사라졌다. 그녀는 그 곳에 앉아 글쓰는 일을 즐겼고, 답답한 마음을 풀어내는 행위로 삼았다.



몇 번의 계절을 지나 선선한 바람이 부는 어느 여름, 그녀는 아주 오랜만에 다시 그 서점을 찾았다.

한쪽 벽에 걸려있는 익숙한 글씨체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몇해 전 자신이 쓴 글이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와 맞지 않는 연애에 마침내 종지부를 찍고 담담한 마음으로 써내려갔던 그 글.

그녀는 마치 타자가 된 것처럼, 지난 계절의 이야기를 호기심 가득한 마음으로 읽어보았다.


     속초
                        - 김시담                 

그 해 생일, 나는 속초로 가는 가장 빠른 버스표를 샀다.
도시는 비슷하게 줄지어선 고층빌딩으로 무성했고, 그 모습이 새삼 낯설게 느껴졌다. 얼마를 달렸을까, 눈 앞의 풍경을 푸른 산과 강이 대신하기 시작했다. 나는 생각했다. 그것은 대신한 것일까, 되찾은 것이었을까.     

그와 나의 풍경은 흑백사진과 푸른 빛 유화처럼 뒤섞일 수도, 같아질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는 세상 만물을 흰색과 검은 색, 0과 1로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애석하게도 나는 흑과 백 사이를 수놓는 무수한 색채들의 인사를 못 본 체 지나칠 수 없었고, 이진법으로 해결할 수 없는 복잡한 문제들이 더 눈에 띄었다. 우리는 철저히 다른 세상의 사람이었다. 그것은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그에게서 사랑받을 수 없음이 나를 무던히도 아프게 했지만, 그래도 난 내가 좋았다.
도화지 위 선선한 그림을 그리는, 기분에 따라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혼자 훌쩍 떠나버릴 용기가 있는 내가 좋았다.

더 이상 나를 어울리지 않는 틀에 욱여넣지 않기를,
내 안의 팔레트를 다 같은 색으로 칠해버리는 억지를 부리지도 않기를.
차창 밖으로 가까워지는 바다를 보며 나는 스스로와 작은 약속을 하였다.


'이게 아직도 붙어있네'

짧지 않은 시간 한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그 글을 바라보며 그녀는 오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리고 지금의 감정을 담아 속초를 재정의하고 싶다는 생각이 일었다.


     속초2
                         - 김시담  
                         
이 계절은 온통 푸르다.
스물다섯 해째 맞이하는 여름이지만
평생 극지방에서 자라
난생 처음 여름을 만난 아이처럼
폴짝폴짝, 또 사뿐사뿐 이 계절과 당신의 마음 위를 건너고 있다.    

푸르다,
마치 처음 만난 여름처럼.
사뿐거리는 마음들은 오갈 데 없이 푸르다.


속초와 속초2, 나란히 붙어있는 글들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같은 제목의 글이었지만 극명히 다른 온도가 느껴졌다. 절대 사랑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지난 겨울을 지나, 태초부터 함께였던 것만 같은 사람과 함께하는 여름. 안간힘을 쓰지 않아도 초여름의 녹음 아래 살고 싶다는 꿈을, 평생을 바라왔던 낭만적 구원을 그녀는 마침내 손에 쥐었다.


저만치 멀리서 그녀에게 선물할 책을 고르고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진지한 표정과 한껏 힘을 준 눈썹에 싱긋 웃음이 났다. 그녀는 그를 향해 한달음 내달렸다.


처음 맞이하는 여름이었다.

사뿐거리는 마음이 오갈 데 없이 푸른, 스물 다섯의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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