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시담 Oct 22. 2022

어느 몽상가의 사랑

'그가 나를 너무 사랑하는 것 같아서 우울해. '

그녀에게 행복은 늘 머나먼 나라의 것이었다.


그녀는 지독한 몽상가였기 때문에 자신과 가장 먼 곳의 것을 꿈꿨다.

그 꿈과 자신이 가까워지지 않기를 바랐고, 멀리서 지켜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다. 자신이 소망하던 것이 손아귀에 가까워 올 때, 그녀는 뒷걸음질쳐 달아났다. 그녀에게 특별한 다정을 베풀어주는 사람을 만날 때면 특히 더 경계심을 늦출 수 없었다.

그녀는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도 지독하고 절절한 사랑을 갈구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을 만났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행복감보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사랑의 포근함은 달콤한 사탕의 유혹과도 같았고, 언젠가 녹아 없어져버릴 달콤함에 속으면 안 된다며 스스로를 다그쳤다. 마음을 늘 단단히 유지해야 했다. 그래야만 자신을 지탱하는 기둥이 하나쯤 빠지더라도 무너지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그 어떤 세간의 풍파에도 깨지지 않을 것 같아보이는 그녀의 단단함 아래에는, 수없이 반복되는 기도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은 새벽이 잠들어 있었다.

그리하여 사랑은, 그녀가 가장 갈망하는 몽상(夢想)인 동시에 가장 원치 않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에게서 어느날 뜻밖의 반가운 연락 한 통이 왔다.

그녀와 꼭 닮은 눈빛을 가진 사람과 사랑에 빠졌다는 소식이었다.


내가 아는 한, 그녀가 사랑에 빠질 확률은 아주 희박한 확률들의 무수한 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가령, 동일한 목적지로 향하는 동일한 항공사의 같은 항공편 바로 옆자리에 앉는 사람과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는 것이 그녀가 정한 룰이었다.

하지만 무수히 잦았던 해외여행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옆자리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늘 공석이었다. 가끔씩 누가 걸어오는 듯한 인기척에 고개를 들면, 나이 지긋한 백발의 아저씨가 그 자리를 차지하곤 했다.

처음에는 영화 속 주인공을 꿈꾸는 마음으로 비행기 탈 날만을 기다리며 설렜지만, 자신이 ‘그 흔한’ 멜로영화 속 주인공이 될 수 없음을 자각한 후로는 자리에 착석하는 순간부터 목적지 도착의 순간까지 눈을 붙이고 잠을 청하는 그녀였다.

언젠가 그녀가 이 이야기를 하며 씁쓸하면서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던 것을 기억한다.

이쯤 되면 그녀는 ‘사랑에 빠지지 않기 위한’ 가장 어려운 확률들의 조합을 설계해둔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토록 사랑으로부터 내내 도망치던 그녀에게서 ‘사랑에 빠졌다’는 말을 듣다니.

그녀는 ‘사랑의 철학’ 교양강의 옆자리에 앉은 국문학과 남학생과 사랑에 빠졌다고 했다.

에리히 프롬의 저서인 <사랑의 기술>을 탐구하는 철학수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학생의 책상 위에는 어찌된 일인지 플라톤의 <향연>이 놓여있었다고 한다. 책을 잘못 들고왔다고 하기에는 아주 오랜 시간 공들여 읽은듯해 보였다고 했다.

꽉 찬 강의실에 그녀를 위해 준비된 듯 비워져 있던 단 하나의 좌석, 그리고 그녀가 좋아하는, 그러나 결코 흔하지 않은 사랑에 대해 논하는 고서까지. 언젠가 자신이 꿈꿨던 여객기에서의 로맨스보다도 오히려 더 낭만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사랑에 빠진 것을 느낀 순간, 그녀는 여느 때와 같이 자신을 향해 몰아쳐올 사랑의 달콤한 파도에 날을 세워 경계했지만, 어쩐지 모든 것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고 했다ㅡ마치 이렇게 되기만을 기다려온 것처럼.

그와의 사랑에서는 더 이상 눈썹 사이에 힘을 주지 않아도, 내내 아파하지도, 단단한 성벽을 쌓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직감이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더 이상 홀로 세상을 헤집고 삐걱거리지 않아도, 자신을 위해 준비된 암초들을 상대하지 않아도 되리라는 확신이 생겼다고 했다.

태초에 잃어버린 반쪽을 되찾은 듯, 텅 비고 모난 마음의 모서리가 가득 메워진 느낌이 들었고,

언제든 꺼질 듯 불안하게 흔들렸던 지반까지도 그녀를 더욱 단단히 고정시켜 주는 안정감을 주었다고 했다.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바라볼 때면 몽상가처럼 잡히지 않는 꿈만을 좇는 그녀가 걱정됐다.

고집스러운 성정 때문에 모두들 쉽게 하는 사랑을 거부한 채, ‘운명의 반쪽’이라는 미명 아래 다가설 수도 없는 장벽을 만든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토록 찾아헤매던 운명의 반쪽을 만나 사랑을 시작했고, 누군가가 늘 꿈꾸고 그리던 반쪽이 되었다.


“내게 있어 사랑은 멀리서 떠오르는 요원한 부표같은 것이었어. 다가가면 멀어지고, 끝내 닿을 수 없는.

나를 위해 준비된 사랑 따위, 없을 거라고 믿었는데.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모든 것을 손에 쥔 듯 생생해. ”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녀의 마지막 문장이 마음속을 오래도록 맴돌았다.

몽상가가 던지는 사랑의 신호탄이었다.




이전 06화 속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