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눈먼 탐욕이 불러오는 선득하고도 통렬한 비감, 썩어 들어간 자아가 토해내는 추악하고도 역겨운 본성."
코랄리 파르자 감독의 <서브스턴스>는 지나친 탐욕이 불러온 대재앙을 다룬다. 이 작품은 2024년 개봉작 중 가장 충격적이고 끔찍한 영화라고 칭해도 가히 과언이 아니다. <서브스턴스>는 선명한 주제 의식을 극한으로 몰아붙이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관객의 넋을 잃게 만든다.
한때 유명세를 떨쳤던 할리우드 배우 엘리자베스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인기를 잃어간다. 그런데 그런 그녀에게 더 나은 버전의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기회가 주어진다. '서브스턴스'라는 약물을 투여한 엘리자베스는 수라는 젊고 아름다운 여성으로 거듭나 승승장구하게 된다. 그러나 규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그녀의 외면과 내면은 점차 썩어 들어갔고, 결국 충격적인 참극과 비참한 말로를 맞게 된다.
이 영화에서 가장 훌륭한 부분을 택하라고 한다면 초반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군더더기라고 할 만한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본작의 초반부는 정보 전달의 역할을 맡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역할을 탁월히 수행해 낸다. 후술하겠지만 오프닝 씬은 간단명료한 연출로 주인공 엘리자베스의 흥망성쇠를 나타낸다. 또한 직접적인 시각 정보를 바탕으로 엘리자베스의 심경을 대변한다. 대표적으로 대형 광고판에 붙은 자신의 얼굴이 찢어지는 것을 바라보는 엘리자베스의 모습이 그러하다. 이에 이어 영화는 엘리자베스가 '서브스턴스'라는 약물을 투약하게 되는 과정을 몽타주로 속도감 있게 전개 해나간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영화는 빠르고 간결하게 관객들을 끌어들인다.
영화의 초반부가 훌륭한 이유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위와 같은 전개 방식과 여러 상징물이 한 데 어우러지는 점 역시 뛰어나다고 말할 수 있다. 그중 기억에 남는 두 가지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교통사고로 인해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나온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발견한다. 바로 '서브스턴스'라는 의문의 문구와 전화번호가 적힌 USB였다. 이 USB는 곧, 더 나은 버전의 자신으로 향할 수 있는 초대장을 의미한다. 그리고 직후에 엘리자베스가 마주치게 되는 인물은 자신의 중학교 동창인 프레드이다. 엘리자베스는 프레드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자신에게 여전히 아름답다고 말해주는 그의 연락처가 적힌 쪽지를 건네받는다. 프레드의 쪽지는 엘리자베스에게 지금의 자신으로 살 것을 종용하는 회유문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병원에서 나온 순간 엘리자베스는 지금의 나와 새로운 나, 둘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는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프레드는 쪽지를 건네는 과정에서 쪽지를 흙탕물에 떨어뜨리고, 이를 건져 엘리자베스에게 건네준다. 이는 곧 두 선택지 중, 현재의 자신에 모습에 만족하면서 살아간다는 선택지가 좌절될 것을 암시한다.
서브스턴스를 통해 젊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 엘리자베스는 에어로빅 쇼 오디션장을 찾아간다. 자신을 '수'라고 소개한 그녀는 방송사 중역인 하비의 인정을 받는다. 완벽한 외모를 지닌 그녀의 이름을 들은 하비는 자신의 부하직원을 부르는데, 그 과정에서 이름이 너무 길다며 불평한다. 그런데 이처럼 긴 이름을 지닌 인물은 그의 부하직원뿐이 아니다. 바로 주인공인 엘리자베스 역시 그러하다. 다시 말해, 이 장면은 엘리자베스라는 긴 이름의 조락해가는 스타가 아닌 수라는 짧은 이름의 라이징 스타에게만 주목하고 있는 하비의 시선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나의 존재이면서도, 서로가 대극점에 서 있는 엘리자베스와 수의 차이가, 대조적인 이름의 길이에서부터 부각된다고 할 수 있다.
엘리자베스의 더 나은 버전인 수가 나오게 되는 곳은 바로 그녀의 등이다. 엘리자베스의 등이 갈라지며 수가 나오는 장면은 굉장히 충격적이면서도, 이 영화의 정체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장면 중 하나이다. 그런데 왜 하필 등일까? 등은 우리의 신체 부위 중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부위, 우리가 볼 수 없는 부위이다. 작품의 초반, 엘리자베스와 수의 관계가 틀어지기 전까진 마치 수가 엘리자베스의 등, 즉 약점을 보완해 줄 수 있는 존재처럼 그려진다. 그러나 이는 작품의 후반부로 갈수록 어긋나고 만다. 엘리자베스의 등은 남들에게 보여줄 수 없는 더러운 욕망이 도사리고 있는, 그렇기에 더욱 감춰야 하는 그녀의 이면을 보여준다. 특히나 엘리자베스와 같이 대중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직업인 연예인에게는 보이는 모습과 대비되는 보이지 않는 야욕의 의미가 더욱 강조된다.
작품에서 등 못지않게 중용되는 신체 부위가 있다. 바로 눈, 그리고 입이다. 하비는 엘리자베스를 레스토랑으로 불러, 그녀에게 프로그램에서 하차할 것을 요구한다. 이때 카메라는 익스트림 클로즈업과 슬로우 모션으로 그의 입을 비추고, 새우 씹는 소리를 극대화하여 불쾌감을 불러일으킨다. 출세와 명예를 향한 더러운 야욕을, 하비는 새우를 씹으며 그의 입으로 토해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엘리자베스의 욕망은 눈에서 출발한다. 그녀의 눈이 바라보는 곳은 외적 아름다음과 대중적 인기다. 한때 전 세계의 각광을 받았던 할리우드 배우로서, 예전과 같은 젊음과 인기를 선망하는 것은 그릇된 욕구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녀의 욕망은 점차 부풀어올라 야욕으로 번진다. 한쪽 눈이 깨진 그녀의 사진은 그녀의 욕망이 어긋나고 있음을 은유한다.
그리고 그녀의 욕구는 점차 눈에서 입으로 향해간다. 그녀가 파티에서 만난 남성과의 정사를 즐길 때, 클로즈업으로 보이는 그녀의 입이 일례라고 할 수 있다. 이윽고 작품의 결말부에 이르러, 몬스트로 엘리자수가 되어버린 그녀는 자신의 입으로 유방을 내뱉는다. 이는 곧, 뒤틀린 성적 욕구 혹은 더러운 자신의 본성을 입이라는 욕정의 신체 부위로 실토하게 되는 것이다.
엘리자베스와 수는 서로 번갈아가면서 일주일을 보내도록 되어있다. 둘은 하나이기에 만날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 만날 수 없는 둘이 만나는, 내가 나를 만나는 역설이 이루어진다. 엘리자베스와 수가 만나는 장면은 내용적인 측면에서 상당히 경악할 만한 부분인 동시에, 작품의 내재적인 의미의 측면에서도 매우 흥미로운 장면이다.
엘리자베스는 더 이상 서브스턴스의 투약을 진행하지 않겠다며 수를 제거하려 한다. 그러나 우유부단한 엘리자베스의 행동의 소치로 수가 깨어나 엘리자베스를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수와 엘리자베스가 동일 인물임을 전제하고 생각한다면, 이 사건은 내가 나 자신을 죽이는 사건이다. 혹은,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나의 추잡스러운 욕망이 나를 잡아먹는 장면으로 생각할 수 있다.
두 사람은 각축을 벌이다, 거울 앞에 자리 잡게 된다. 흉측스러운 엘리자베스의 외모와 그악스러운 수의 내면은 거울을 통해 서로를 마주하고 만다. 양자 간의 조우 혹은 상충은 무척이나 충격적이다. 그리고 이 즈음에서 "기억하라. 당신은 하나다."라는 작품의 핵심적인 대사가 떠오르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단일적인 정체성을 역설하는 메시지와는 달리 엘리자베스와 수가 만나게 된, 다시 말해 그녀가 하나가 아닌 둘이 되어버린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자아를 욕망이라는 돋보기로 조명한다면, 추레한 탐욕을 지닌 두 사람이 하나와 다름없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그 결과, 엘리자베스와 수의 급박하고도 위태로운 난투에, 이와 같이 모순적인 대사가 얹히게 된다.
카메라는 에어로빅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수의 모습을 상당히 노골적이고 외설적으로 찍어낸다. 카메라가 수의 몸을 핥는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혹자는 젊은 여성의 탄력 있는 몸매를 이처럼 굳이 외설스럽게 담아냈어야 하냐며 반문을 제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노골적인 장면들은 모두 필요에 의해 담긴 장면이다. 수의 모습을 이와 같이 보여주는 것은 작품의 초반부이다. 영화의 초반부는 젊음과 성적인 매력을 희구하는 엘리자베스의 욕망을 점차 드러내는 것이 요점인 부분이다. 때문에 성적인 매력이 가득한 수의 몸매를 바라보는 시선의 주체는 엘리자베스라고도 말할 수 있게 된다.
반면, 영화의 후반부는 초반부와 상당한 대조를 이룬다. 엘리자베스의 탐욕으로 몬스트로 엘리자수가 탄생하며 그녀는 내장이 몸 바깥으로 드러나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외적인 아름다움을 지나치게 탐하다, 오히려 자신의 내면이 썩어 들어가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초반과 후반의 대조, 외모와 내면의 대비는 작품의 선명한 주제 의식을 강렬하게 시사한다.
앞선 소주제에서 언급했다시피 오프닝 씬은 간단명료하게 엘리자베스의 흥망성쇠를 보여준다. 그녀가 인기를 얻어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오르고,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명판 위에서 사진을 찍는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점차 그녀의 인기가 식어가는데 이를 금이 간 그녀의 명판과 그 위에 음식을 떨어뜨리는 행인을 통해 연출한다. 이처럼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유수의 몽타주를 보여주며 관객의 눈길을 강렬하게 그러쥔다
엔딩 씬 역시 오프닝 씬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명판에서 이루어진다. 선혈이 낭자한 아수라장을 빠져나온 엘리자베스는 얼굴만 남은 채로 자신의 명판으로 향한다. 카메라는 자신의 명판 위에서 밤하늘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점 쇼트를 보여주며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관객에게도 보여준다. 그녀의 눈에는 밤하늘과 야자수로부터 눈부신 별빛이 떨어지는 환각이 보인다. 이는 전과 같은 명예와 명성의 회복을 향한 그녀의 갈망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하지만 관객들이 연이어 보게 되는 것은, 버드 아이 뷰로 부감한 흉측한 엘리자베스의 모습이다. 결국 자신의 탐욕에 스스로가 잡아먹힌 그녀가 녹아내리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비춘다. 엘리자베스가 녹으며 명판엔 핏자국이 생기는데, 엔딩 씬의 명판이 오프닝 씬의 케첩으로 더럽혀진 그녀의 명판과 수미상관의 구조를 이룬다는 점 역시 상당히 흥미롭다.
훌륭한 영화이고, 재밌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이 있다. 특히 후반부의 연출에는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결말부의 연출이 그저 자극을 위한 자극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결말부는 영화의 작품성을 고취하는 방식이 아닌, 그저 자극만을 추구하는 방식의 연출을 택한다. 한마디로 과유불급의 엔딩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결말부가 아쉬운 다른 한 가지 이유는 지나친 오마주에서 기인한다. 선혈이 낭자하는 엔딩 시퀀스에서 <서브스턴스>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샤이닝>을 오마주한다. 위대한 작품을 오마주하는 것 자체는 문제 될 것이 없으나 그 방식엔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작품이 지향하는 방향성이 있고, 그 방향성에 부합하는 작품을 차용하는 것이 적절한 오마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본 작은 오마주를 하기 위해, 오직 오마주를 하고 싶어서 작품의 방향성과 지향점을 <샤이닝>에 고정시킨 채 나아간다. 이와 같은 오마주 방식엔 다소 아쉬움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