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집밖 백선생 Jun 26. 2023

새벽 두 시 상담 전화

비가 온다 하기

비가 많이 온다 하기

남은 700여 걸음 못다 걷고

들어앉았는데

비가 안 온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걸을 걸.

하루 오천걸음 걷는 게

원래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어?


설핏 잠이 들었다가

잠시 깼는데

한 학생이 기말고사 문제의 답으로

메일 상담이 온다.

내일은 오전엔 계절학기 수업

오후엔 병원 예약


늦은 오후나 돼야

집에 올 듯한데

내 정신으로는

그동안 혹시 잊어버릴 수도 있을 듯하여

가능하다면 지금 전화 달라는 시간은

새벽 두 시.


이십 년을 대학에서 강의했지만

새벽 두 시에

학생 질문 상담하긴 처음.

새벽 두 시에는

학생은 물론

가족과도 전화통화는 안 하지.

학생도 나도

일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기이한 체험.


점점 내 기억력에 대한 자신이 없어진다.

내 뇌에 대해 점점 불신한다.

사소한 에피소드 기억력은 타의추종을 불허하지만

중요한 일 관련된 것을 실기하여 손해 봤던 경험이 있었던지라.

문제가 생기면 그 자리에서 해결해야 맘이 편하다.

그래도 새벽 두 시에 상담은 과했다.


그래도 학생입장에선 기말시험 관련된 거고

이 새벽에 메일을 보냈다면

내심 다급했을 터.

내가 자고 있다면 모를까.

내가 확인하고 바로 해결할 수 있는 걸 갖고 시간 끌면

학생 애만 닳지 싶어

잘한 것 같기도.


두 다리 뻗고 자고픈데

한 번 깨서 그런지

다시 잠에 들기 어렵다.

어찌하면 푹 잘 수 있을까.

이 밤 중에 걸어야 하나.


비가 오면 좋겠다.

빗소리 asmr을 틀어놓고

잠을 청한다.

이 새벽에 일어난 일련의 해프닝도 잠재우고

나도 재울 수 있는 빗소리가 되길 기대하며.

매거진의 이전글 왠지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어야 할 것 같은 곳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