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칼호수, 고요 그 너머에는

시베리아 횡단열차

by 작은 의미

바이칼호수로 가는 관문인 이르쿠츠크는 흑백영화 세트장 같았다.

고요히 솟아오른 성당의 종탑과 목조 건물에 삐걱거릴 듯 굳게 닫힌 나무 창문은 깊은 숨결을 간직하고 있는 듯했다. 거리에는 퇴색해 버린 트램이 세월의 기적소리를 내며 달리고, 00 학원, 00 관광이 그대로 새겨진 버스가 도로를 누비며 오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바닥에 그려진 그린 라인을 따라 낡고 아름다운 도시를 거닐다 보니 오래된 시간에 갇혀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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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중앙시장의 주차장으로 갔다. 바이칼호숫가 마을인 리스트비얀카로 가는 밴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질서 없이 서 있는 밴들과 승용차 사이를 지나 작은 창구를 찾아 얼굴을 들이밀자, 판매원이 바로 “바이칼?” 하며 종이를 내밀었다. 종이에는 바이칼호수까지 가는 소요 시간, 첫차와 막차 시간, 요금 등이 한국어로 적혀 있었다. 러시아, 특히 이런 로컬에서는 영어가 전혀 통하지 않았을 텐데, 이렇게 한국어 안내판을 만들어 준 누군가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우리는 내일 갈 예정이라고 하자 판매원도 고개를 끄덕이며 이곳으로 오라는 손짓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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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다시 찾아가니 주차장에 서 있던 러시아 청년이 “바이칼?” 하고 묻는다.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사람들이 이미 가득 타 있는 밴으로 안내했다.

우리는 두 자리 남은 맨 뒤 좌석에 앉았다.

밴은 중간에 사람을 내려주거나 태우기도 하며 1시간여를 달려 앙카라강과 바이칼호가 만나는 리스트비얀카에 도착했다. 기차를 타고 오면서 창밖으로 보던 바이칼호수가 눈앞에 펼쳐졌다. 호수라 부르기엔 믿기지 않을 만큼 광대했고, 바다라 부르기엔 물빛이 너무 맑고 깊었다. 끝을 알 수 없는 수평선이 하늘과 맞닿아 있고, 호수 가장자리의 물결은 파도가 되어 부서졌다. 호숫가로 내려가 발을 담가 보았다. 투명한 물결이 반짝이며 수정처럼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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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칼호수 그 중심으로 조금 더 다가가고 싶었다. 배를 타고 가서 철길 트레킹까지 하고 오는 3시간짜리 투어를 신청했다. 쌀쌀한 날씨 때문인지 투어를 신청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몽골계 러시아 부인 두 명, 모스크바부터 블라디보스토크까지 2주간 횡단 열차 여행을 한다는 이탈리아 청년 한 명, 그리고 우리 부부가 전부였다. 배를 타고 가면서 젊은 여성 가이드는 호수의 크기와 이곳에 살고 있는 동식물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다행히 사진과 함께 영어로 설명을 해 주니 조금씩 알아들을 수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깊은 바이칼호수는 지구의 20%의 물을 담고 있다고 하니, 호수 위에 떠 있는 우리가 너무 작게 느껴졌다. 배가 나아갈수록 끝없이 펼쳐진 푸른 물결은 바다처럼 넓고 깊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빗방울이 떨어져 바이칼에 녹아들었다. 1시간여를 가서 작은 선착장에 내리자, 호수 한가운데서 검은 먹구름이 밀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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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가 준비한 우비를 입고 철길로 올라가니 빗줄기가 굵어졌고, 바람도 세차게 불기 시작했다. 비 오는 철길 트레킹을 해야 하는 것인지, 다시 배를 타고 돌아갈 수는 있는 것인지 불안과 후회가 먹구름처럼 몰려왔다. 젊은 가이드는 아랑곳하지 않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이탈리아 청년도, 러시아 부인들도 아무런 동요 없이 앞서 걸어가니 그냥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어느 순간 비는 우박으로 바뀌었다. 얼굴을 들 수조차 없었다. 우비가 바람에 펄럭여 두 손으로 움켜잡아봐도 옷 속까지 젖기 시작했고 운동화도 질퍽거렸다. 1시간여를 걸어 기차 터널에 도착했다. 이곳은 시베리아 횡단 노선 중 가장 난공사였던 구간이었다고 한다. 비를 피해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터널에서 나오자 멀리서 기적소리가 들려왔다. 안전하게 철길 아래로 내려가 기차가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기차 안에서 우리를 봤다면,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 기찻길 옆을 걷는 우리들이 얼마나 청승맞아 보였을까. 흰 구름 두둥실 떠 있는 파란 하늘 아래 푸른 호숫가, 야생화가 하늘거리는 철길 따라 걷는 것을 기대하며 신청한 투어는 극기 훈련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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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던 길을 돌아 1시간 만에 우리를 기다리는 배로 무사히 돌아왔다. 비를 피해 아래 칸 선실로 내려갔다.

가이드가 준비해 준 따뜻한 차를 마시고 담요를 두르자 젖은 옷에 덜덜 떨리던 몸이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끝이 아니다. 여기서 다시 1시간 배를 타고 돌아가야 했다. 작은 배는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 순간 바이칼은 거대한 생명체가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남편 손을 꽉 붙잡고 숨죽여 앉아 있었다.

러시아 부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깔깔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거대한 자연 속에 살다 보니 자연의 변화에 익숙한 탓일까, 아니면 놀이기구를 즐기는 커다란 심장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괜스레 씩씩한 그녀들이 야속했다.

이탈리아 청년은 긴장된 분위기를 풀어보고 싶었는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의 노래는 바이칼을 달래기 위해 부르는 자장가 같았다. 남편도 한국 노래 한 곡 부르겠다고 했다. ‘무슨 노래를 부르려고?’ 나는 잡고 있던 남편 손을 꼬집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의 만류는 모른 체하고 한국의 자장가라며 ‘섬집아기’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이들 어릴 적 불러주던 노래를 어느새 나도 작게 따라 불렀다. 노래가 바이칼을 잠재우지는 못했어도 잔뜩 겁먹은 내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주었고, 우리는 무사히 투어의 시작점으로 복귀했다.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뜨니 파란 하늘이 더없이 맑게 개어있었다.

바이칼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체르스키 전망대에 올랐다. 맑고 고요한 호수가 발아래 펼쳐졌다. 어제의 소란은 온데간데없었다. 전망대 난간에는 바이칼 수호신에게 호수의 평온과 인간의 안전을 기원하는 붉고 푸른 띠들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가만히 앉아 호수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맑고 고요한 호수 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꿈틀거리고 있는 무엇이 보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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