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 횡단열차
고요한 열차가 덜커덩하며 서서히 속도를 늦춘다. 딱딱한 2층 침대에 누워있던 내 몸도 덩달아 덜컹거리며 깨어났다. 전날 석양으로 물들었던 산촌의 모습이 여명으로 차오르는 장면으로 슬라이드처럼 바뀌어 있었다.
승강장으로 내려와 허리를 펴고 숨을 들이마시자 붉은 여명에서 뿜어내는 청량한 새벽공기가 몸속을 휘돌았다. 남편도 기차에서 내려오더니 매점으로 향했다. 나도 뒤를 따랐다. 시골 구멍가게 같은 매점에서 물건을 사서 문을 나서려고 하자 젊은 주인이 시계와 기차를 번갈아 가리킨다. 기차 출발까지 아직 시간이 남았다고 알려주는 것 같았다. 우리도 알고 있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자신이 보고 있던 휴대전화 영상을 보라며 손짓했다.
영상에는 광활한 초원에 많은 무리의 사람들이 말을 탄 한 남성을 에워싸고 있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내레이션과 자막이 함께 나오는 것이 한 편의 다큐멘터리 같았다. 젊은 주인은 말을 탄 남성이 자기라며 가리킨다. 우리가 멋지다고 엄지를 들어 보이자, 그는 기분 좋게 웃고는 영상을 끄고 매점 밖으로 나갔다. 우리도 인사하고 자리를 뜨려 하자 따라오라며 손짓한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망설이는데, 어느새 남편은 젊은 주인을 따라나서고 있었다. 매점 옆 양철 문을 열고 들어가니 영상에 나왔던 백마가 있었다. 말을 쓰다듬는 주인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흘렀다. 러시아 시골 마을에서 스치듯 만난 이 젊은 주인의 이름이 무엇인지, 백마를 타고 광야를 달리는 삶은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누구보다 백마를 아낀다는 것, 백마와 삶의 여정을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침 식사 후 짧은 낮잠을 자고 일어나니 복도에서 남편과 러시아 아이가 웃으며 도란도란 얘기하는 모습이 보였다. 어제저녁, 어느 작은 역에서 러시아 젊은 부부가 어린 남매와 함께 기차에 올랐었다. 아이들을 좋아하는 남편은 웃으며 ‘안녕’ ‘도브리 젠’을 번갈아 가며 인사를 건넸지만, 아이들은 낯선 동양인 아저씨를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았었는데, 어느새 말동무가 되어 있었다. 러시아 어린 남매 중 오빠인 니키타와 번역 앱으로 소통하고 있었다. 니키타는 BTS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래서 꼭 한번 한국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한국이 어디쯤 있는 나라인지, 서울이라는 도시는 알지 못했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BTS의 노래를 알고 있었다. BTS 사진을 찾아보고 노래를 흥얼거리는 남편과 니키타가 닮았다며 진주 선생님들이 사진을 찍었다.
그녀들이 보내 준 사진에는 ‘러시아에서 찾은 혈육’이라고 쓰여 있었다.
우리는 다 같이 사진을 보며 웃었다. 기차에서 만난 이들은 나이와 국적을 가르지 않고 친구가 되었다.
울란우데를 조금 지나자 같은 객실의 러시아 할아버지가 내 어깨를 툭툭 치며 복도로 나오라고 손짓하셨다. 객실 밖으로 나가니 바이칼호수가 보이기 시작했다. 날씨가 맑지 않아 조금 아쉽긴 했지만, 창밖으로 펼쳐진 끝도 없이 보이는 풍경이 바다가 아닌 초원 위에 펼쳐진 호수라는 것이 그저 신기했다. 바이칼호수가 보이자 너나 할 것 없이 사람들이 복도에 나와 사진을 찍고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러시아 할아버지도 할머니를 사진으로 담고 있었다. 나도 애교 많고 상냥한 할머니와 사진을 찍었다. 같은 객실의 러시아 노부부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낱말 십자 풀이를 따로, 또 같이 하셨다. 그들의 여정을 알지 못하지만 아마도 기차 여행이 익숙한 삶의 일부였으리라 생각했다. 울란우데 지나고 보이기 시작한 바이칼은 5시간 넘게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호수의 길이가 우리나라 서울에서 부산의 거리보다 길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도시가 가까워오자 할아버지는 창밖을 보라며 나를 또 부르신다. 공장지대가 나타나는 도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나 보다. 우리의 목적지인 이르쿠츠크가 다가오자, 대도시의 화려한 야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짐을 싸며 러시아 노부부와 몇 번의 스바시바를 주고받으며 인사했는지 모른다.
기차가 서서히 승강장 위로 들어가고 많은 사람이 내리려고 복도에 줄지어 서 있는 틈으로 멀리 있던 니키타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남편에게 안겼다.
남편은 니키타를 번쩍 들어 안아주었다.
둘의 얼굴에는 잘 가라는, 반가웠다는, 너무 빨리 헤어져 아쉽다는 무수한 언어들이 흐르고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던 끝도 없는 자작나무 숲, 기차에서 맞이한 붉은 여명과 석양, 바다 같이 넓은 바이칼호수의 풍경이 영화처럼 지나갔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적응하느라 좌충우돌하는 우리에게 따뜻한 친절을 베풀어 주었던 니콜라이 부부, 드넓은 광야를 누비는 젊은 백마 주인, BTS를 좋아하는 아홉 살 니키타, 다정다감했던 러시아 노부부, 무표정하지만 친절했던 나이 든 남자 승무원의 모습이 한 장면 한 장면 넘어갔다.
3박 4일, 75시간의 여정에서 러시아 자연과 도시의 풍경보다 사람 풍경이 더 깊은 여운으로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