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먹고, 또 먹고

시베리아 횡단열차

by 작은 의미

시베리아 횡단 열차는 벌판 위 러닝머신 같다. 끝도 없이 자작나무 숲을 달린다.

나는 정지해 있고, 자작나무들이 거꾸로 달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열차는 달리고 달려 작은 역에 멈췄다. 대륙 속 작은 산골 마을, 굴뚝 위로 피어오르는 연기는 고요한 하늘을 향해 가만히 오르고, 기찻길 따라 자전거를 타는 아이들은 잠시 머무는 손님을 향해 손 흔들며 웃음꽃을 피웠다. 그 웃음은 바람을 타고 내 마음속까지 닿았다. 처음 본 그 마을은 마치 오래된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연기냄새, 지는 햇살에 붉게 물든 지붕, 자전거 바퀴가 구르는 소리, 모든 것이 서두르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며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시간조차 이 마을에선 잠시 멈춘 듯했다. 익숙하지 않은 이국의 마을이었지만,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따뜻해졌다. 아마도 그 순간 나는 그곳에 머문 것이 아니라 풍경의 일부가 되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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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다시 천천히 움직이고 열차는 어느덧 석양에 물든 들판을 가르며 천천히 달렸다.

끝없이 펼쳐진 평원과 하늘 사이로 붉은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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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 유리창에 이마를 살짝 기대어, 들판의 붉은 선을 따라가고 있는데, 객실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남편이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순간 서정적인 영화를 보다가 갑자기 찌지직 소리를 내며 화면이 꺼지는 것 같았다.


침대 밑 가방에서 라면을 꺼내 뜨거운 물을 받아와서는 눈을 크게 뜨고 기다리고 있는 남편에게 눈치껏 좀 먹으라고 눈을 흘리며 타박했다. 그는 천진하게 웃으며 라면을 들고 객실 밖으로 나갔다. 복도 끝으로 가더니 객실과 객실이 연결되는 곳에서 후루룩 면을 건져 먹고 국물까지 다 들이키며 ‘카~’ 만족해한다. 라면 먹는 모습이 이토록 밉상일 수 없었다.


남편은 한식을 선호한다. 한식을 좋아하는 것을 넘어 먹는 것에 진심인 사람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때도 취사가 가능한 알베르게에 머물 때면 여지없이 밥을 해 먹었다. 가져간 고춧가루를 살짝 넣어 채소를 버무리기도 하고 길에서 뜯은 나물을 데치고, 수제비에 심지어 닭볶음탕까지 해 먹었다. 나는 순례길 막바지 즈음에는 한식 말고 순례자들이 간단하게 해 먹는 뻣뻣한 파스타가 너무 먹고 싶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의 3일 동안은 기차 안에서 식사를 해야 한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열차에서 먹을 수 있는 간편 음식을 단단히 챙겨 왔다. 남편은 평소 아침을 안 먹는 사람이다. 그런데 여행하는 내내 누룽지, 컵반, 컵라면을 번갈아 가며 삼시세끼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역에 도착하면 매점으로 달려가 과일이나 맥주를 사 먹기도 했다. 한 번은 내가 식당칸에 가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하자고 했다. 힘겹게 주문한 음식은 손바닥보다도 작은 돈가스 한쪽이 다였다. 남편은 객실로 돌아와 컵라면으로 배를 채우며 그 이후로 식당칸은 다시는 안 가겠다고 했다. 반면 러시아 사람들이 먹는 모습은 많이 목격하지 못했다. 식당칸을 이용하는 사람도 극히 드물었다. 마치 겨울잠 자는 동물들처럼 최소한의 음식을 먹는 듯했다. 움직임도 제한적이고, 먹거리도 다양하지 않다 보니 그럴 만도 할 것이다. 그러나 남편은 눈 뜨면 먹고, 먹고 나면 자고, 일어나서 또 먹는다. 특별히 할 일이 없으니 먹는단다.




열차가 머무는 동안 러시아 부인들이 손수레를 끌거나 바구니를 들고 와 물건을 팔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승강장은 어느새 작은 시장으로 변했다. 나는 한국에서 가져온 간편식만 고집할 게 아니라 길거리 음식도 한 번 사 먹어보자고 했다. 셋째 날 아침, 열차가 서서히 승강장으로 들어서자, 철길을 가로질러 달려오는 러시아 여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우리도 승강장으로 내려갔다. 즐비한 여인들 사이, 나이가 제일 많아 보이는 할머니에게서 닭다리와 양파무침, 달걀을 샀다. 그리고 매점에서 햄과 빵도 사 왔다. 우리가 사 온 음식들과 같은 객실의 러시아 할머니가 주신 오이와 토마토로 아침을 차렸다. 양파무침이 새콤달콤 입맛에 맞았다. 바게트 빵에 양파무침을 얹어 먹으니 잘 어우러져 맛있다. 남편도 한국에서 먹던 초무침 같다며 좋아했다. 우리는 빵에 양파무침과 햄, 오이, 토마토를 곁들인 완벽한 샌드위치로 만족스러운 아침 식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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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 객실에는 한국인 젊은 여성 두 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진주에서 온 교사라는 그녀들도 우리처럼 이르쿠츠크가 목적지였다. 그녀들은 해외여행할 때 굳이 한국 음식을 안 챙겨 온다고 했다.

‘나도 혼자면 안 챙겨 오지요...’

끼니마다 챙겨 먹는 우리가 번잡스럽게 보이지 않을까 싶어 살짝 부끄러웠다.


남편은 샌드위치를 만들어 그녀들에게 맛보라며 건넸다. 샌드위치를 받아 들고는 모든 것이 열악한 기차 안에서도 다양한 재료들을 이용해 먹은 것에 놀라워했고, 한 입 베어 물고는 그 맛에 또 한 번 놀라워했다. 칭찬받은 남편은 이 정도쯤이야, 라며 우쭐했다. 그날 저녁, 그녀들이 3일 동안 한식은 한 번도 못 먹은 것 같아 미역국밥과 컵라면. 볶음김치까지 챙겨서 주었다. 그들은 국물까지 남김없이 다 먹었다. 낯선 이국땅에서 귀한 한국음식을 먹으니 행복감에 배가 부르다고 했다. 우리는 나눌 수 있어 더 배가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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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여행도 다 먹고살자고 하는 건데, 잘 먹어야 한다며 옆에서 한마디 보탰다.

알죠. 하지만 좀 적당히 먹읍시다. 나는 눈빛으로 말했고, 남편은 못 본 척 외면했다.





이 글은 2019년 여름 여행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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