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를 달리는 기차

시베리아횡단열차

by 작은 의미

어서 와 블라디보스토크는 처음이지?

새벽녘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파란색 간판과 유리 외관으로 이루어진 공항은 우주에 띄워놓은 푸른 유리 상자 같았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출발시간은 저녁 8시다. 잠깐이라도 편히 쉬려고 택시를 타고 아르바트 거리에 있는 게스트하우스로 향했다. 게스트하우스 작은방 침대에 누우니 까치 창 너머 푸르스름 동이 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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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너 시간 피곤한 눈을 붙이고 정오가 다 되어서야 짐을 맡기고 블라디보스토크 여행을 시작했다. 게스트하우스가 있는 아르바트 거리에서 시작하여 도심에 있는 명승지 곳곳을 걸어 다녔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여름은 한국만큼 더웠다, 8월, 한여름이라 하지만 명색이 시베리아 아닌가? 이렇게 더울 줄은 몰랐다. 더위에 지친 남편은 택시를 타자고 했으나, 택시를 타기에는 애매한 거리여서 그냥 걷자고 했다. 그러나 지도상 표시된 거리는 도시의 언덕을 넘어야 했고, 아르바트 거리에 도착했을 때는 남편도 나도 모두 지쳤다. 일단 남편을 좋아하는 음식으로 달래야 했다. 조지아 정통 음식을 맛볼 수 있다는 레스토랑에서 긴 대기 끝에 양갈비로 이른 저녁을 먹더니 남편은 다시 생기가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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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독한 신고식

기차 시간 1시간여 남기고 게스트하우스로 짐을 찾으러 갔다. 우리는 하루 종일 걸어서 땀범벅이 되어 있었다. 남편은 도저히 못 참겠다며 호스트에게 양해를 구하고 공용 욕실에서 샤워를 했다. 양해를 구하는 남편이 뻔뻔해 보이고, 체크아웃 후 시설을 다시 이용하는 것은 민폐라는 생각이 들었다. 샤워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기차에 타면 씻을 수 있을 것 같아 꾹 참았다.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에 도착하니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시발점답게 커다란 가방을 든 사람들이 기차역에 가득했다. 한국에서 가져온 e티켓을 실물 티켓으로 교환해야 하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발권 창구가 보이지 않았다. 기차 시간이 다가오니 불안도 다가왔다. 2층과 1층을 오르내리다 한 층 아래, 승강장으로 내려가 마침내 작은 발권 창구를 찾았다. e티켓과 여권을 보여준 후 종이 티켓으로 교환했다. 한숨 돌릴 틈도 없이 기차 승강장을 찾아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계단을 오르내렸다. 거의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출발 20여 분을 남기고 우리가 탈 기차가 대기해 있는 승강장에 도착했다. 끝도 없이 긴 기차가 서 있었다. 티켓에 적힌 객실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객차마다 서 있는 제복 입은 승무원은 굳은 표정으로 티켓과 여권을 꼼꼼히 확인했다. 기차 안으로 들어가자 긴 복도가 이어졌고 객실 문 앞에 호실이 쓰여 있었다. 우리가 예약한 이등석은 2층 침대가 마주한 4인실이었다. 복도 중간쯤 위치한 객실을 찾아 들어갔더니 찜질방이 따로 없다. 냉방이 들어오지 않는 객실, 설마 이 상태로 가진 않겠지? 객실 안에 있을 수가 없었다. 짐만 내려놓고 다시 승강장으로 나왔다. 어둠이 찾아온 낯선 도시의 기차역 승강장엔 시원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잠시 땀을 식히고 있으려니 비로소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탄다는 게 실감 났다. 출발시간이 다 되어서야 다시 기차에 올랐다. 기차가 출발했고, 겨우 냉방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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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 타기 전 이미 땀을 많이 흘린 상태라서 바로 화장실로 가서 세수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화장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승무원을 찾아가 화장실 문이 안 열린다고 말했으나, 승무원은 러시아어로만 말했다. 승무원의 말은 안드로메다은하처럼 까만 밤, 내 귀를 빙빙 떠돌 뿐이었다. 다만 고개를 가로젓는 것이 이용할 수 없다는 뜻 같았다. 어찌할 바를 몰라 복도를 오가다가 객실로 들어오니, 같은 객실에 탑승한 러시아 아저씨가 나에게 손짓하며 부른다. 복도에 붙은 기차 운행 시간표를 보여주며 설명하지만, 여전히 아저씨의 말도 우주를 달리는 기차 바퀴와 함께 무심히 굴러만 갔다. 그러나 아저씨의 표정은 ‘조금만 참아. 곧 열릴 거야’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의 진심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알려 줘서 고마워요.’


다시 승무원을 찾아갔다. 구글로 번역 앱에 화장실을 사용하고 싶다고 전하니, 번역기로 들려온 문장은

‘안전지대가 아닙니다’였다. 안전지대라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알고 보니 기차가 블라디보스토크를 완전히 벗어난 후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러시아 아저씨는 기차 시간표를 보여주며, 기차가 역에 도착하거나 출발하는 앞뒤의 시간은 화장실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했던 것이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별도의 오물처리가 되지 않고 그대로 배출되기에 도심에서는 화장실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남편이 게스트하우스에서 샤워할 때 나도 할 걸 후회가 밀려왔다. 타인에게 서슴없이 부탁하는 남편을 눈치 없다고 면박을 주곤 했지만, 이럴 땐 타인의 이목보다 자신의 욕구에 충실한 남편의 세상살이가 부러웠다.

생각보다 좁은 이등석에서 짐 정리로 점점 더 땀이 범벅되었다. 겨우 짐 정리하고 휴대전화를 충전하려고 했더니 복도에 있는 콘센트는 이미 다른 충전기로 꽉 차 있었다. 내가 왜 이 여행을 한다고 했나 후회가 밀려왔다.


화장실 사용이 가능한 그 안전지대는 블라디보스토크 출발 1시간이 지나서였다. 화장실이 열렸다고 같은 객실에 있던 러시아 아저씨가 손짓으로 알려줬다. 집에서 가지고 온 작은 플라스틱 통을 들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런데 낡은 화장실은 둘째치고 수도꼭지를 앞으로 뒤로 젖혀도 물이 안 나온다. 수도꼭지를 붙들고 물 좀 주세요, 울며 사정하고 싶었다. 마침 지나가는 소년에게 도움받아 수도꼭지 여는 방법을 터득했다. 작은 통에 물을 받아 얼굴을 씻고 대충이나마 머리를 감고, 물수건으로 몸을 닦고 났더니 비로소 온몸에 산소가 공급되는 것 같았다. 그제야 긴 복도의 객실마다 앉아있는 사람들의 모습, 승무원의 공간, 뜨거운 수증기가 올라오는 물통이 보이기 시작했다.




밤이 깊어져 복도를 오가는 사람들도 하나둘 객실로 들어가 문을 닫아 고요해졌다. 덜커덩거리는 철로 위 바퀴 소리만 들렸다. 복도에서 까만 창밖을 멍하니 보고 있노라니 내 마음도 진정되었다. 불빛 하나 없는 들판을 달리는 기차, 승무원의 군인 같은 제복, 허공을 맴도는 언어들, 내가 마치 우주를 달리는 은하철도에 탑승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기차가 어둠을 헤치고 달려가 어떤 정거장에 멈출지 기대하며 덜컹거리는 이층침대로 올라가 잠을 청했다.



* 이 글은 러시아 전쟁 전에 다녀 온 이야기를 기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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