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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지박약사 Jun 04. 2024

축하받지 못할 합격

  아버지께서 퇴원하셨다. 나는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 저 계명대 의대 합격했어요." 아버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학원 담임선생님이나 교회 목사님처럼 축하한다는 말 한 마디도 해주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침묵을 지키셨다. 그 앞에서 나는 감히 500만원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다. 체념한 나는 등록금 고지서를 찢어버렸다.


  4년 전액장학금을 준다는 성균관대 약대에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돈 없이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은 도저히 생각해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서울대 약대에서 문자가 왔다. "합격을 축하합니다. 등록금을 OO월 OO일 OO시까지 납부해주세요." 나는 수능 공부를 하기 전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를 떠올렸다. 그렇다. 서울대 약대 합격은 하나님의 기도 응답이었다. 난 어떻게든 그곳에 들어가야만 했다. 집에 계신 아버지를 찾아가 이렇게 말씀드렸다.


  "아빠, 저 서울대 약대 합격했어요."

  "나는 니가 경북대 복학했으면 좋겠다."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경북대 전자전기과가 취업도 잘 된단다."


  아버지 앞에서 등록금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했다. 아버지는 내가 예전처럼 아버지와 함께 공장에 나가길 원하셨다. 그게 아니라면 경북대에 복학해서 내가 대구에 남길 원하셨다. 지금은 아버지가 왜 그러셨는지 조금 이해하지만, 그 때는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서울대 합격증은 내가 6개월동안 목숨을 걸고 공부한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였다. 난 억울해서라도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할머니께 말씀드렸다. 나는 할머니께 딱 한 번 등록금 300만원만 내주시면,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하겠다고 말씀드렸다. 며칠 후 등록금 납부마감 몇 시간 전에 할머니께서 전화하셔서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돈 구해놨다. 집에 와서 아빠랑 같이 은행 가라."


  내게는 잊을 수 없는 감동의 순간이었다. 아버지와 나는 집에서 가까운 대구은행으로 갔다. 아버지는 300만원을 인출하시기 위해 현금자동인출기 앞으로 가셨다. 기계에 버튼을 누르시면서 아버지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돈 니 주기 너무 아깝다." 아버지의 눈빛은 불안하게 흔들렸고, 손이 조금 떨리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두 손에 300만원을 꼭 쥐고 한참동안 놓지 않으셨다. 내게 300만원을 줄까 말까 계속 고민하시는 것 같았다. 휴~ 한숨과 함께 아버지는 그 돈을 내게 주셨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나는 어렵게 서울대생이 되었다. 내가 서울대에 합격했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가 온 동네 사람이 다 알게 되었다. 가까운 이웃은 한 아주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떻게 그 집안에서 서울대에 들어갈 수 있지?" 동네 친구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니가 다른 데는 다 들어가도 절대로 서울대는 못 간다 생각했데이. 서울대는 면접고사가 있다 아이가. 근데 니는 말을 "몰라"밖에 못 하잖아. 니 어떻게 합격했노? 진짜 축하한데이." 우리 할머니께서는 새벽기도 시간에 목사님의 축하를 받으셨다. "우리 교회 유품이 권사님 손자가 서울대학교에 합격했다고 합니다. 축하드립니다." 할머니는 내게 그 말을 해주시며 해맑게 웃으셨다. 나는 그 무엇보다 할머니의 웃음이 좋았다. 내가 할머니의 기쁨이 될 수 있어서 행복했다.


  설날에 가족들이 다 모였다. 사촌누나가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온 가족이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 반면 내 서울대 합격은 상대적으로 찬밥 신세였다. 왜 그랬을까? 나는 오랫동안 이 질문을 두고 궁금해했다. 나이 마흔이 넘자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어른들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 집안에서 '서울대'는 마치 '우주'처럼 비현실적인 단어였던 것이다. 수도권 대학에 입학해 본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심지어 서울대에 놀러가 본 사람도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이 볼 때에 나는 이제 사치스러운 '우주여행'을 떠나는 비현실적인 존재가 된 것 같았다. 만질 수는 있지만, 볼 수는 없는 투명 인간 같은 존재가 된 기분이었다. 투명 인간은 있다고도 말할 수 없고, 없다고도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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