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시간까지는 앞으로 2시간이 남았다. 내 마지막 공부로 어떤 과목을 선택할 지 잠시 고민했다. 나에게 가장 불안한 과목은 무엇일까? 언어영역이었다. 언어영역을 90점 이상 받은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2시간동안 열심히 공부해서 한 문제라도 더 맞히자고 생각했다. 나는 사자성어, 속담, 맞춤법을 공부하기로 결정했다. 작은 책자를 꺼내 2시간동안 집중해서 읽었다. 2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시작종이 울리고, 언어영역 시험지를 나눠주셨다. 맨 마지막 장을 펼쳐서 재빨리 풀었다. 그리고 맨 앞 장으로 돌아와 차근차근 풀어나갔다. 내가 딱 풀 수 있을만큼 쉽게 출제된 난이도였다. 유명한 지문이 나와 모의고사보다 풀기가 수월했다. 모든 문제를 다 풀었는데도 시간이 아주 약간 남았다. 그 순간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대망의 수학시간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수학, 내가 가장 자신있는 과목 수학, 꼭 100점을 받고야 말겠다는 각오로 나는 집중했다. 총 30문제 중 막히는 문제가 5문제 있었다. 남은 시간은 30분. 나는 갑자기 불안해졌다. 내가 5문제를 30분만에 다 풀 수 있을까? 이거 다 틀리면 어떡하지?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샤프펜슬을 든 내 오른손은 소나기 아래 나뭇잎처럼 흔들렸다. 떨림은 30분 내내 제어가 되지 않았다. 나는 손을 떨면서 문제를 풀었다.
다섯 문제 중 두 문제는 가까스로 풀었고, 두 문제는 적당한 수를 계속 대입하는 노가다방식으로 억지로 풀었다. 가장 어려운 벡터 문제는 어떤 방법으로 풀어도 도무지 풀리지 않았다. 남은 시간은 단 5분. 이제 답안지에 마킹을 시작해야했다. 문제를 완벽히 풀진 못했지만, 난 답으로서 가장 가능성이 높은 3번을 찍었다. 단 한 문제 빼고 확실히 다 맞힌 것 같았다.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이제 점심시간이 되었다. 나는 검정색 봉지에서 김밥을 꺼냈다. 은박지를 열어보니 김밥상태가 좋지 않았다. 김은 눅눅하고, 여기저기 노란 기름이 흘러나와 굳어있었다. 색깔도 약간 흐릿한 게 도무지 신선해보이지는 않았다. 내 옆자리에 앉은 고3학생은 무얼 먹나 쳐다봤다. 고3학생은 엄마가 싸 준 보온도시락에 담아온 미역국과 밥을 먹고 있었다. 굉장히 부러웠다. 수능시험을 준비하는 내내 그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았건만. 내 힘으로 모든 난관을 뛰어넘으리라 다짐했건만. 그 때 내 속마음은 약간 무너졌다. 엄마가 싸 준 김밥을 먹어본 적이 있었던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김밥은 너무 맛이 없었지만, 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나는 괜찮겠지라고 생각하며 우겨넣었다.
30분 정도 지나자 아랫배가 살살 아프기 시작했다. 시험치기 전 화장실에 다녀와야 할 것만 같았다. 나는 휴지를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불행하게도 바로 그 때 3교시 시작종이 울렸다. 나는 다시 앉아야만 했다. 등에서 식은 땀이 약간 흘러내렸다. 영어듣기 11번이 약간 들리지 않았다. 그 때 나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12번까지 계속 정신줄을 놓고 말았다. 이 두 문제는 나머지 영어시험을 치는 내내 내 마음을 압박했다. 문제를 다 풀긴 했지만, 내 마음은 찝찝했다.
과학탐구영역 시간은 이상하게 마음이 편했다. 이제 마지막시험이란 생각이 드니 빨리 끝내고 집에 가고만 싶었다. 긴장이 풀리고 집중력이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수능 시험날 아침에 불타올랐던 나의 열정은 약간 미지근하게 식은 채로 끝을 맺었다. 이제 내 의식은 수능모드에서 현실모드로 다시 돌아왔다. 앞으로 어떻게 혼자 살아가야할지 막막했다. 그러나 어쨌든 끝났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이것으로 되었다. 난 정말 믿을 수 없을만큼 홀가분했다.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교실 밖을 나와 교문으로 걸어가는 발걸음은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틀릴 수도 있는 문제들을 세어보았다. 이를 토대로 수능점수를 계산해보니 정확히 475점이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난 내 목표를 이룬 것이다. 그러나 아직 채점 전이기 때문에 확신할 순 없었다.
교문 앞에 용이와 욱이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와 키다리아저씨도 와 계셨다. 그들은 내게 "수고했다. 그동안 고생했다."고 말하며 격려해주었다. 나의 시험을 기억하고, 수험장까지 찾아와준 그들의 정성에 나는 감동했다. 그 감동은 지난날들의 고생들 하나하나를 지나가며 위로해주었다. 그날 나는 수능 공부 시작 이후 처음으로 술을 마셨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친구들과 나는 2차로 PC방에 갔다. 6개월만에 가니 PC방의 분위기가 너무 어색해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PC방에 가자마자 나는 채점하기 위해 수험표 뒤에 적어온 내 답안을 꺼내고, 인터넷으로 '수능 정답'을 검색했다. 난너무 긴장되어서 친구들과 멀리 떨어진 구석에 혼자 앉았다. 다행히 친구들은 서서히 게임의 세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채첨을 시작하였다.
언어영역에서 틀린 문제는 단 두 문제였다. 1점짜리 한 문제와 2점짜리 한 문제. 언어영역 점수는 97점이었다. 재수학원 입학 이후 문제집을 풀거나 모의고사를 칠 때, 단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점수였다. 기적이 일어났다. 나는 흥분하기 시작했다.
수리영역을 채점하고 나는 소리를 지를 뻔 했다. 만점이었다. 마지막에 3번으로 찍은 벡터문제를 맞춘 것이다. 1,2교시 점수는 200점 만점에 197점이었다. 나는 '이러다 서울대 의대 들어가는 거 아냐?'라는 행복한 상상을 잠시 했다. 빨리 친구들에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외국어영역은 듣기에서 두 문제, 독해에서 두 문제 총 네 문제를 틀렸다. 점수는 92점이었다. 영어듣기에서 두 문제나 틀려서 속상했다. 순간 김밥이 원망스럽고, 그걸 먹은 나 자신이 실망스러웠다. 외국어영역 1등급은 힘들 것만 같았다. 그래도 최악의 점수는 아니었다. 1,2교시에서 좋은 성적을 냈으니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과학탐구영역은 화학, 생물에서 각각 1개씩 틀렸다. 그 과목들은 만점을 받은 적이 없는 과목들이었기 때문에 그 정도면 나름 선방했다고 생각했다. 200점 만점에 194점을 획득했다. 총점을 계산해보았다. 500점 만점에 483점이었다. 내 목표인 475점을 뛰어넘는 멋진 점수였다.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나는 이것이 기도응답이라고 믿었다. 서울대 약대에 가게 해달라는 나의 황당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