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의지박약사 Jun 03. 2024

대학 입학원서를 넣으며

다음 날 시험지를 보며 다시 가채점을 하기 위해 재수학원에 다시 갔다. 데미안과 친구들을 만나 어제 본 시험에 대해 나누었다. 데미안은 나를 보자마자 내 수학점수를 물었다. 내가 100점이라고 말하니 "오 마이 갓"이라고 대답하며 깜짝 놀랐다. 데미안은 "학원에서 수학 만점자를 아직 세 명밖에 못 봤어"라고 덧붙였다. 나도 데미안의 점수가 궁금해졌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표정과 말투에서 초조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성균관대 약대, 서울대 약대, 계명대 의대에 입학원서를 넣었다. 성균관대 약대는 4년 전액장학금 혜택이 있기 때문에 당장 돈이 한 푼도 없는 나에게 가장 이상적인 학교였다. 하지만 내 목표는 서울대 약대였기 때문에 최악의 상황에만 가기로 결정했다. 계명대 의대는 순전히 내 욕심으로 지원한 곳이다. 실력이 없어서 의대에 못 간 게 아니라, 돈이 없어서 의대에 안 갔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육년간의 경험으로 데미안은 점수와 지원학과만 들어도 합격인지 불합격인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지원학과를 말하자 데미안은 "3타수 3안타. 걱정할 거 하나도 없어. 좋겠다."라고 말했다. 학원 담임선생님은 나와 입시상담을 하면서 내게 자꾸 쓸데없는 질문을 했다. 예를 들어, "너희 아버지 뭐하시노?" 같은 질문 말이다. 나는 "회사원입니다."라고 거짓말했다. 


  만약 내가 정직하게 "저희 아버지는 정신병동에 강제입원 중이십니다."라고 말했다면 그 분의 표정이 어땠을까? 나는 너무 부끄러워서 차마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또 그렇게 말하는 건 아버지에 대한 실례라고 생각했다. 선생님은 왜 내 얼굴을 그렇게 빤히 쳐다보셨을까? "니 누구꺼 빼꼈노?"라고 내게 말해서 미안하셨던걸까? 내 성적이 4개월만에 90점이나 올라서 놀라셨던걸까? 마지막에 선생님은 환하게 웃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의대 합격. 축하한다."


  교회 청년부 목사님으로부터 같이 식사하자는 연락이 왔다. 평소 내가 존경하던 목사님이시고, 또 경북대 선배님이셨기 때문에 거절할 수가 없었다. 목사님께서는 내가 태어나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중국집 코스 요리를 사주셨다. 너무 황송해서 몸둘 바를 몰랐다. 목사님께서도 학원 담임선생님처럼 내게 "의대 합격을 축하한다"고 말씀하셨다. 그 당시 나는 어른들이 내게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목사님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목사님, 저는 서울대 약대에 가려고 합니다. 그곳에 가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드렸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응답해주신 겁니다." 목사님께서는 그래도 의대에 가는 게 더 좋다고 말씀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내게 굉장히 도움되는 합리적인 조언이다.


  기도응답 외에도 내게는 의대에 갈 수 없는 이유가 3가지 더 있었다. 첫째로 경제적인 이유였다. 우리 집은 부동산을 포함한 전재산이 2000만원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가난했다. 의대 등록금 500만원을 낼 돈도 당연히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마이너스통장을 만들거나, 대출을 받는 방법이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는 두 번째 이유가 있었다.


  둘째로 정신적인 이유였다. 가끔씩 나는 아버지께서 나를 찾아와 괴롭히는 꿈을 꿨다. 실제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만약 내가 계명대학병원에서 일을 하게 된다면, 아버지는 분명히 그곳을 찾아오실 것이다. 병원에서 난동을 부리거나, 자해를 할 확률이 높았다. 늘 그런 불안에 시달리면서 살 수는 없었다. 난 무조건 아버지로부터 멀리 도망가야만 했다. 


 셋째로 쾌락적인 이유였다. 만약 내가 대구에서 계속 살게 된다면 다시 게임에 빠질 것 같았다. 나는 성격이 단순해서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할 수가 없다. 나는 게임 중독자가 되거나 공부 중독자가 되거나 둘 중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대구에는 가장 친한 친구들이 많았기 때문에, 친구들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대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만약'이라는 가정을 많이 하게 된다. 만약 그 때 누군가가 내 스폰서가 되어주었다면 어땠을까? 만약 그 때 누군가가 나에게 돈을 빌려주었다면 어땠을까? 만약 그 때 누군가가 나에게 먼저 대출을 받고, 졸업 후에 갚으라고 알려주었다면 어땠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도 결국은 동일한 결론에 이른다. 지금까지의 인생을 천천히 돌아볼 때 서울대 약대에 가기로 한 것이 가장 잘한 선택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만약 지금의 내 경제적, 정신적 상태라면 물론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23살의 나는 참 어리고 약했다. 아직 모든 무거운 짐을 짊어질 준비가 되지 않았다. 난 아직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전 14화 이날을 위해 6개월을 준비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