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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지박약사 Jun 05. 2024

내가 왜 서울대에 있지?

  등록금은 간신히 낼 수 있었지만, 나는 서울에서의 학교생활을 시작할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았다. 나는 정말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무소유 상태였다. 아무 것도 잃을 것이 없었기에 두려운 것이 없었다. 나는 정말 서울에 대해 무식했기 때문에 용감했다. 무엇보다 서울대에 합격했다는 자부심은 나로 하여금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샘솟게 했다.


  엄마는 내가 진짜 서울대에 합격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하신 것 같았다. 엄마와 키다리아저씨는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나를 자랑스러워하셨다. 특히 키다리아저씨는 6개월 전에 자신이 형식적으로 말한 조언을 내가 듣고 이루어내자 놀란 표정으로 날 계속 쳐다보셨다. 30만원씩 여섯 번. 180만원은 그분에게는 푼돈이었다. 그 푼돈으로 한 사람의 인생이 이토록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시는 것 같았다. 키다리아저씨는 갑자기 자책하셨다.


  "난 네가 정말 약대에 들어갈 줄은 몰랐어." 

  "네. 그러실 수 있어요. 저도 그랬으니까요."

  "내가 잘못했어. 사법고시에 도전해보라고 말하는건데."


  나는 키다리아저씨의 그 간접적인 제안을 한사코 거절했다. 지난 6개월간의 고뇌와 고통이 떠올랐다. 다시 또 내 몸을 혹사시키면 분명 무슨 병이라도 걸릴 것 같았다. 우리 모두는 서울대 약대에 만족하기로 했다. 서울 변두리 아주 작은 아파트에서 살고 계셨던 엄마는 나를 위해 방 한 칸을 내어주셨다. 서울로 올라가기 전 나는 할머니와 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렸다. 할머니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섭아, 난 니가 알아서 잘 하리라 믿는다."

  "네. 할머니. 제가 다 알아서 할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짐을 챙겨 기차를 타고 서울로 떠났다. 할머니께서는 돈도 없이 혼자 서울로 떠나는 손자를 걱정스런 눈길로 바라보셨다. 인정 많고, 따뜻한 그 할머니의 마음씨가 내 마음 속에 미열을 일으켰다. 어릴적부터 날 키워주신 할머니의 은혜를 난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다. 


  군대를 제대한 24세의 청년이 더 이상 할머니에게 짐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반복해서 나의 각오를 되뇌었다. '이제 나는 진짜 어른이다. 나 혼자의 힘으로 대학생활 4년을 감당해내야 한다. 4년만 더 고생하자.' 기차는 내 마음의 어지러움과 상관없이 계속해서 목적지인 서울로 달려갔다.


  서울은 나에게 완전히 미지의 세계였다. 창문 바깥으로 대구에서 볼 수 없었던 고층 빌딩들이 보였다. 은빛 물살이 잔잔하게 흐르는 한강이 보였다. 고층 빌딩들을 보며 나는 알 수 없는 힘에 눌려 긴장했다. 그러나 한강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나는 감탄하여 오랫동안 멍하니 한강을 쳐다보았다. 저기 서울 어딘가에 있을 서울대학교를 생각했다.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곳은 원래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곳, 학교에서 전교 5등 안에 드는 괴물들만 가는 곳이었다. 나는 조금씩 겁이 났다. '내가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나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는 마치 총을 들고 전쟁터로 달려나가는 병사가 된 것만 같았다.


  나는 서울로 가자마자 최상위권을 위한 고등학교 화학 문제집을 샀다. 입학하기 전 예습을 하기 않으면 절대로 수업을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았다. 이미 고등학교 수준을 뛰어넘었을 동기생들에게 무시당할 생각을 하닌 벌써부터 창피해졌다. 면접고사에서 내가 교수님들께 보여드렸던 내 바보 같은 이미지를 조금이나마 만회하고 싶었다.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은 면접시간에 과학 중 한 과목을 선택해 시험을 친다. 나는 물리를 선택했다. 재수학원 물리선생님께서는 면접고사에서 대학물리 수준의 문제를 만날 가능성이 높다고 말씀하시며 겁을 주셨다. 나는 대학물리를 단시간에 정복할 자신이 없었다.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 안에서도 지하철 안에서도 나는 물리 문제집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오전에는 '운동량', 오후에는 '전기'에 관한 문제가 출제되었다. 나는 오전반이라서 다행히 상대적으로 쉬운 파트인 '운동량'에 관한 문제를 풀게 되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만약 내가 오후반이었다면 아마 나는 한 문제도 풀지 못했을 수도 있다. 면접문제는 총 다섯 문제, 제한시간은 20분이었다. 나는 다섯 문제 중 세 문제를 푼 후, 면접장에 들어갔다. 나의 면접은 형편없었다. 말투는 아직 군대식이었고, 나의 설명은 논리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인 호소에 가까웠다. 교수님께서는 내 엉뚱한 답변을 듣고, 고개를 갸우뚱거리셨다. 낮은 면접점수에도 내가 합격할 수 있었던 이유는 수학점수에만 더해지는 20%의 가산점 덕분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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