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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지박약사 Jul 04. 2024

약사고시를 마치고 원주로 떠나다

  나는 4학년 2학기 마지막 기말고사까지 최선을 다해 공부했다. 그러나 대학교수나 과학자가 되고 싶다는 꿈이 사라진 뒤 나는 예전처럼 공부에 동기부여가 되지 않았다. 차갑게 식어버린 나와 달리 다른 동기생들은 4학년이 되자 활활 불타올랐다. 그들은 대학원 진학을 위해 진지하게 관심 있는 분야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제약회사 취업을 원하는 학생들도 평점을 높이기 위해 더 열심히 공부했다. 이 때부터 A+가 나올 거라는 내 예상은 번번이 빗나가기 시작했다.


  졸업요건인 150학점을 넘어 159학점을 이수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여덟 번의 학기가 끝나고, 이제 졸업이라는 고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 약사고시 뿐이었다. 나는 또다시 1학년 때처럼 좌절감을 느꼈다. 다른 동기생들 중에는 벌써 약사고시 준비가 끝난 친구도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 4학년 1학기부터 약사고시 준비를 시작했고, 늦어도 2학기부터는 다 시작한 걸로 알고 있다. 그런데 나는 시험일 40일전까지 정말 하나도 준비하지 않았다.


  당시 약사면허 시험 합격률은 85% 정도였다. 서울대 약대는 더 낮아서 80%까지 내려가기도 했다. 서울대생이 공부를 더 못한다니 논리적으로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여기는 수재들만 모인 학교가 아닌가. 신입생 시절 들은 교수님의 말씀이 불현듯 떠올랐다.


  "여러분들은 약사 면허증 딸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좁은 약국에 갇혀 일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인재들입니다, 여러분 모두 과학자가 되어 신약 개발에 이바지하면 좋겠습니다."


  아마 다른 교수님들과 같은 생각이신 것 같았다. 서울대 약대는 약사면허증 취득을 강조하지 않는 특이한 학교였다. 교수님들은 약사고시를 대비하기 위한 수업을 준비하시지 않았다. 거의 모든 교수님들은 딱히 약사고시에 도움이 되지 않는 자신의 연구 분야에 관한 내용을 가르치셨다.  


  나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시험에 불합격하면 부끄러워서 어떡하지?'라는 걱정이 내 마음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 하루하루가 악몽처럼 두려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마음은 더 초조해졌다. 다행히 착한 동기생들은 모두가 합격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다른 학교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 결과, 우리는 '약사고시를 위한 전국 약대 모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우리과에서 가장 공부를 잘 하는 에이스를 우리 학교 대표로 내보냈다. 에이스는 과연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나는 각 과목의 요약집을 구해 외우고 또 외웠다. 기출문제를 풀고 또 풀었다. '대한약전'이란 과목은 무조건 암기해야 하는 과목이어서 굉장히 힘들었다. 약사고시를 준비하면서 전공 선택과목인 대한약전을 수강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남은 시간은 40일 뿐이었지만, 공부할 내용은 기말고사 40번은 능히 치고 남을만큼 많았다. 나는 효율적으로 공부해야 했고, 짧은 자투리 시간이라도 소중하게 여겨야 했다.


  나는 공부할 장소를 약대 독서실로 정했다. 약대 독서실에는 수십 명의 동기생들이 있어 자료를 쉽게 구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무조건 공부해야만 하고 또 무조건 합격해야만 하는 힘든 시기였기 때문에,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서로를 의지하였다. 나는 매일 아침 6시 30분에 입실하고 밤 12시에 퇴실했다. 독서실에 가장 빨리 오는 사람도 나였고, 독서실에서 가장 늦게 나가는 사람도 나였다. 몇몇 학생들은 내가 독서실에서 잔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공부해도 대한약전의 내용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약품을 제조하고 보관하는 방법들, 약품으로 실험하고 약품의 특성들을 측정하는 방법들은 너무 딱딱하고 형식적이어서 나는 공부하는 내내 거부감이 들었다. 한 과목이라도 40점 미만인 과목이 나오면 불합격인데, 나는 약전에서 40점 이상을 받을 자신이 없었다. 나는 우울해졌다.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모자랐다. 나는 5분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 양치질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대신 나는 가그린을 사서 입안을 구석구석 헹구었다. 그것으로 나는 점심시간과 저녁시간에 각각 5분, 하루 10분이라는 시간을 더 만들어낼 수 있었다. 한 달 정도 가글을 했으니 나는 총 300분 즉 5시간을 더 공부한 셈이다.


  시험 전날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중앙도서관에 가서 앉아있었지만,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나는 중앙도서관 3층을 서성이며 돌아다녔다. 나와 같은 이유로 고통받고 있는 불쌍한 얼굴들이 몇몇 보였다. 대구 출신인 한 여동생이 시험장까지 같이 가자고 내게 연락했다. 택시를 타고 그 동생을 데리러 갔다. 어머니로 보이는 중년의 여사님이 그 동생과 함께 계셨다. 나도 시험준비를 도와주는 가족이 있다는 기분을 한 번 느껴보고 싶었다. 그 동생과 같이 택시를 타고 시험장으로 가는내내 기분이 찝찝했다.


 그놈의 약전 때문에 악몽 같은 시험이었다. 나는 합격을 자신할 수 없어서 불안했다. 만약 내가 시험에 떨어지면 그동안 내가 공부 못 한다고 놀렸던 수많은 동기생들이 나를 비웃을 것 같았다. 일년간 어디에도 취업하지 못하고, 혼자서 쓸쓸히 독서실만 다니게 나를 상상하자 미칠 것만 같았다. 나는 최대한 시험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로 작정했다. 내게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친구를 만나 노는 것이었다. 나는 성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성이는 서울의 한 교회에서 알게 된 친구였다. 서울에서 정착할 교회를 찾아 헤매던 나는 동갑내기 친구이자 같은 경상도 출신인 성이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성이는 수년째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취준생이었다. 키도 크고 인물도 나쁘지 않았다. 성이의 가장 큰 매력은 착한 심성이었다. 정말 동화책에서나 볼 법한 착하고 순수한 마음을 지닌 친구였다.


  한번은 내가 학기초에 성이를 학교로 데려와 중앙도서관에서 같이 공부한 적도 있다. 도서관에 들어가자마자 성이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잠시 후 나는 수업을 들으러 갔고, 성이는 혼자 도서관에 남아 공무원행정을 공부했다. 내가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왔을 때 성이는 굉장히 긴장한 모습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우리는 출출한 허기를 달래고자 바깥으로 나왔다.


  "서울대 도서관에서 공부해 본 소감이 어때?" 

  "어......무서워서 죽는 줄 알았다." 

  "아니 공부하는 데 무서울 게 뭐 있노?"

  "아......공부하는 분위기가 장난이 아니더라."

  "그건 그래. 다들 한 번 앉으면 도무지 일어날 생각을 안 하니까."

  "맞다. 나도 3시간동안 둘러봤는데 아무도 안 일어나더라."

  "하하하. 성아. 내가 볼 땐 너도 서울대생 같애. 너무 그러지 마."


  여긴 서울대생이 너무 많다고 호들갑떠는 성이의 리액션 앞에서 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깔깔깔 웃었다. 나는 더 큰 리액션을 보고 싶은 욕심이 생겨서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법대생 룸메이트 이야기를 해주었다.


  "내 기숙사 룸메이트가 03학번 법대생이거든."

  "응. 법대생이면 진짜 공부 잘 하겠네?"

  "당연하지. 충청도에서 항상 열손가락 안에 들었대."

  "우와. 죽이네."

  "자기는 수학 시험시간에 항상 세 번씩 푼대. 그것도 각각의 다른 방법으로. 쉽게 말해, 한 번 풀고 두 번 검산하는거지. 그러면 100점을 확신할 수 있대."

  "미쳤다. 그게 뭔 말이고." 

  "그런데 걔가 하는 말이, 진짜 수능시험은 수학이 너무 어려워서 두 번밖에 풀지 못했대. 검산을 한 번 밖에 못 한 거지. 그래서 100점을 확신할 수 없었대."

  "뭐라카노. 두 번이나 세 번이나 그게 그거지."

  "맞제? 내가 딱 그 생각이다. 그 해 인문계 수학만점자가 0.08%밖에 없었는데, 금마 결국 100점 맞다 안 카나."


  성이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성이는 그저 순수하게 감탄했고, 그들의 좋은 머리를 부러워했다. 나는 성이 특유의 그 리액션이 다시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성이가 내 전화를 받자마자 나는 만나자고 말했다.


  "성아. 내다. 잘 있제? 함 보자."

  "내 지금 원주다. 이사왔다."

  "원주? 거기가 어딘데?"

  "강원도다."

  "내 시험 끝났는데 함 놀러가도 되나?"

  "어. 온나. 근데 내 밤에는 편의점 알바해야 된다."

  "괜찮다. 나도 같이 따라갈게."


  나는 전화를 끊고 '원주'에 대해 검색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성이와 통화하기 전에는 원주라는 도시가 있는지도 몰랐었다. 원주는 강원도에 속해 있었지만,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아보였다. 며칠 후에 원주중앙시장에서 성이와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 당시만 해도 원주 시외버스터미널은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만큼 낡고 허름한 건물이었다. 화장실은 좁았고, 냄새가 지독했다. 나는 택시를 타자마자 시외버스터미널에 대한 재건축 계획이 있는지 여쭤보았다.


  택시기사님은 시외버스터미널 얘기를 듣자마자 버럭 화를 냈다. 기사님은 새로운 장소와 예산이 있는데, 그것들을 다른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고 손님인 내게 계속 하소연하셨다. 나는 같이 안타까워했다. 토착비리. 안타깝지만 이것이 원주에 대한 내 첫 기억이다. 그러나 나나 성이에게는 전혀 상관없는 그들만의 이야가였으므로 나는 더이상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성이는 작은 동네편의점에서 저녁 9시부터 아침 7시까지 야간알바로 일하고 있었다. 성이가 낮과 밤이 바뀐 생활을 하고 있는터라, 나는 약속 시간을 어떻게 정해야 할지 망설였다. 왠지 약속 시간도 낮과 밤을 바꾸면 쉽게 해결될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약속시간을 저녁 7시 정도로 잡았다. 버스시간표를 알아보니 약속시간보다 1시간 전에 도착할 것 같았다. 그 때부터 나는 금쪽 같은 한 시간을 원주에서 어떻게 쓸 지 궁리하기 시작했다.


  약사고시가 끝나자 나는 종종 약사구인사이트에 들어가 정보를 모으고 있었다. 보통 약국에서 월급을 얼마나 주는지, 복지환경은 어떤지, 근무시간은 몇 시간인지, 요즘 어떤 약국에서 약사를 뽑고 있는지를 나는 살피고 또 살폈다. 원주 생각을 계속 하던 나에게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나는 무릎을 탁 쳤다. 누구에게나 다 그런 순간이 있지 않은가? 내가 생각해도 나는 천재인 것만 같은 순간 말이다.


  나는 인터넷 포털에서 지도창을 열어 약속장소인 원주 중앙시장 부근의 약국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약사구인사이트에 들어가 약사를 구하고 있는 원주의 약국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마침 약속장소와 아주 가까운 위치에 있는 '산약국'에서 약사를 1명 채용 중이었다. 나는 바로 산약국으로 전화를 걸어 채용면접을 신청했다. 나는 약속장소에 도착하는 오후 6시에 약국장님을 만나뵙기로 약속했다.


  누군가와 일대일 혹은 일대다수로 이야기해야 하는 면접은 내 가장 큰 약점이었다. 나는 남들과 대화할 때면 늘 남들이 내 약점을 눈치챌까 조마조마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나는 대화에 소극적이 되었고, 내 성격은 점점 더 내성적으로 변해갔다. 이러한 내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나에게 필요한 것은 연습이었다. 그래서 나는 면접을 연습하기로 마음 먹었던 것이다. 내 면접 연습파트너는 산약국의 약국장님이 될 것이었다. 나는 마음 속으로 제발 그분이 좋은 일을 많이 하시는 착한 약사님이었으면 좋겠다고 기도했다.


  산약국은 생각보다 컸다. 나는 약국 안에 작은 사무실도 있어서 조금 놀랐다. 면접장소인 그 사무실로 가면서 내가 마주친 직원 수만 해도 서너명은 족히 되는 것 같았다. 강원도 원주에서 이렇게 큰 약국을 만나다니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길눈이 어두운 나는 약국 맞은편에 큰 대학병원이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잠시 후 머리털을 빡빡 밀고 츄리닝을 입은 덩치 큰 남자 분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셨다. 영화 범죄도시에 나오는 마동석을 연상시키는 근육질과 큰 덩치를 가지신 분이셨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분이 방문을 닫으실 때 나는 마치 진실의 방으로 들어온 듯한 인상을 받은 것 같다.


  그 분이 약국장이셨다. 나는 약국장은 자기 약국에서 츄리닝을 입고 다닐 수 있다는 단순한 진리를 그날 처음 깨닫게 되었다. 약국장님과의 면접은 내 면접 연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는 그 분의 기에 눌려 제대로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 분의 얼굴을 보며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바로 이 분이 내가 어제 만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 드렸던 그 좋은 약사님이라는 확신이 내게 강하게 들었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직관적인 느낌이었다.


  면접을 끝내고 나갈 때 약국장님은 차비로 내게 오만원을 건네셨다. 면접의 성공여부와 관계없이 그 오만원으로 인해 나는 행복했다. 성이가 약국 밖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그 오만원으로 닭갈비를 배부르게 먹고, 편의점에 일하러 갔다. 나는 밤을 새며 게임하거나 공부한 적이 많았기 때문에 편의점 야간 근무도 처음에는 쉽게 생각했다. 그러나 밤새도록 편의점을 지키는 일은 상상 이상으로 힘든 일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지역 주민을 위해 밤새도록 편의점을 지키는 모든 근무자들을 존경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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