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도 게시판에서 근로 장학생을 구한다는 문구를 읽었다. 지난 학기에 이어 이번에도 근로 장학생이 된다면 생활비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나는 과 사무실에 들어가 안면이 있는 교무 실장님께 인사드렸다.
"저 이번에 장애학생 도우미를 구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네, 맞습니다. 하시려구요?"
"네. 제가 도우미를 해도 될까요?"
"죄송하지만 안 됩니다. 여학생이기 때문에 여학생을 구하고 있습니다."
"아, 그렇군요. 일단 알겠습니다."
나는 크게 아쉬워했다. 그 누구보다 내가 장애학생 도우미에 더 적격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소록도에 가서 나병환자들을 방문해 봉사한 적도 있었다. 장애인 수련회에 가서 도우미를 한 적도 있었다. 동기생들 중에는 아무리 살펴봐도 그럴만한 학생은 보이지 않았다. 문득 나는 장애학생이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우리 동기 중에 장애 학생은 한 명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휴학생 중 한 명일거라고 추측했다.
며칠 후 교무 실장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안녕하세요. 장애학생 도우미 때문에 연락드렸습니다."
"안녕하세요. 지난번에 안 된다고 하셨지 않나요?"
"네. 맞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지원을 하지 않네요."
"그래요? 안타깝네요."
"한 번 해보시겠어요? 장애학생이 남자도 상관없다고 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제가 꼭 하고 싶습니다."
나는 한걸음에 사무실로 달려가 지원서를 제출했다. 장애학생 써니를 만나 인사했다. 써니는 몸이 아주 작고 귀여운 여학생이었다. 큰 전동휠체어에 앉아있었으니 아마 더 작게 보였을 것이다. 아마 걸을 수 없거나, 걷기가 매우 불편한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나보다 한 학번 위 선배였으나, 내가 나이가 더 많기 때문에 반말하기로 했다.
써니는 씩씩했다. 나와 얘기할 때 항상 웃으려 노력하고,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가끔 저녁에 수업이 끝날 때면 기숙사까지 같이 가곤 했다. 사실 그녀는 거의 모든 일을 스스로 할 수 있었고, 또 무슨 일이든 혼자서 해내고 싶어했다. 그러다 보니 내가 꼭 해야 할 일은 그녀 혼자서 가기 힘든 실험실에 갈 때 도와주는 것 정도밖에 없었다. 그녀 덕분에 내가 근로장학생이 되었으니 내가 오히려 그녀에게 빚진 기분이 들었다.
써니는 팔이 짧고, 전동휠체어를 타고 다니기 때문에 문을 열고 닫기가 쉽지 않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일부러 문을 열어주지 않은 적이 있다. 직감적으로 그녀를 보통 사람처럼 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상대로 그녀는 그것을 더 좋아했다. 그 이후로 나는 종종 그녀에게 "너는 너무 공부를 못 해"라고 핀잔을 주었다. 나보다 텝스 점수가 200점이나 높은 친구에게 내가 그런 말을 했다니 지금 생각하면 좀 부끄럽다.
그 당시 기숙사에는 인조잔디가 깔려있는 큰 축구장이 있었다. 써니는 갑자기 멈춰서서 한참동안 운동장에서 뛰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오빠, 난 꿈이 달리기 한 번 해보는 거예요. 태어나서 한 번도 못 해봤어요."
난 가슴이 먹먹해졌다. 기숙사 방에 돌아가서 그 아이의 말을 곱씹어보았다. 나의 열등감과 교만함에 대해 반성했다. 써니같이 달리기 한 번 못 해 본 아이도, 아니 앞으로도 평생 달리기는 꿈도 꾸지 못할 저 아이도 저렇게 씩씩하게 잘 살아가는데 내가 지레 겁먹고 열등감에 시달릴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잘난 것도 없는 내가 성적 하나 믿고 교만해지는 것은 더더욱 안 될 일이었다.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욕심부리기보다는 내가 지금 가진 것에 감사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달리기도 할 수 있고, 농구도 할 수 있는 건강한 몸이 있었다. 무엇보다 아직 젊은 나에게는 그 어떤 일에도 도전해볼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인 서울대학교에 들어오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인생에서 학벌이 전부가 아님을. 나는 분명 서울대 약대 에이스였지만, 여전히 나의 마음은 불안했고, 나의 미래는 불투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