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수학 수업 - 봄 (10)
3월이 지나고 나면 학교 시계는 엄청 빨라집니다.
벚꽃 4월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고
라일락 향기 속 5월의 시간은 많은 행사들로 초고속으로 지나고
6월 초, 학교 담장에 장미가 넝쿨째 필 때, 벌써 이른 더위가 찾아옵니다.
새학년 새학기의 수학 수업을 구상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시간 참 빠르네요.
하지만 수학 수업 시간을 단 한 시간도 허투루 보낸 적은 없습니다.
학생들의 수학 노트를 보면, 지나 온 수학 수업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거든요.
수학 교과서가 '검인정 제도'로 바뀌면서 출판사마다 수학 교과서를 참 잘 만듭니다.
미래엔, 천재교과서, 비상교육, 동아출판, 지학사, 금성출판사, 교학사 등등.
중학교 학생수가 130만명이라면, 연간 10만부가 팔리면 베스트셀러라고 할 때,
수학교과서는 130만부가 팔리니 정말 놀랄만한 베스트셀러 이지요.
출판사마다 수학 교과서를 사활을 걸고 만들기에,
수학 교과서는 교육과정이 바뀔 때마다 점점 더 훌륭해 집니다.
출판사마다 수업에 직접 사용할 수 있는 여러 활동 자료 및 ppt 자료도 많이 제공하여,
수학 교과서를 수학 노트처럼 활용해서 수업을 해도 충분히 좋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제가 만든 소박한 학습지로 수업하는 것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여러 출판사들의 수학 교과서를 많이 참조합니다.
아울러 대한민국의 수학 교사들이 매 수업 시간 고심하여 만든 수학 수업 자료들을 서로 아낌없이 공유하는,
'아이들을 살리는 수학 수업'이라는 온라인 카페에서도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초임 시절 저의 수학 수업 학습지에는 배워야 할 내용이 빡빡하게 들어 있었습니다.
학생들에게 하나라도 더 알려주기 위해서
수학 학습지에는, 오늘 배워야 할 수학 개념 소개 및 그 개념의 등장 배경에 대한 수학사 이야기,
그리고 오늘 배운 수학 내용과 관련하여 기초 • 중급 • 상급의 수준별 문제들로 가득했지요.
아마도 그 때 저의 첫 제자들은 수학 수업 시간에 참으로 힘들었을 것입니다.
중학교 3학년 때, 저에게 수학을 배웠던 옛 제자를 우연히 시내 서점에서 만난 적이 있었는데,
"고등학교 3학년 때보다도 중학교 3학년 때, 수학 공부를 더 많이 했던 것 같다."며 서로 웃기도 했습니다.
교단에서 선 시간이 길어지면서 제가 만든 학습지에는 빈칸이 많아졌습니다.
교사가 설명하는 것을 듣고 이해해야 하는 부분보다 학생들이 발견하여 채워야 할 부분이 많아진 것이지요.
20여년 중학교에서 수학 수업을 하면서 바뀐 것이 있다면,
교사는 정답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아니라, 정답에 이르는 과정을 경험하게 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수업의 어느 지점에서 학생들에게 궁금증을 일으키게 할 것인가,
수업의 어느 지점에서 수학자들이 느꼈을 '유레카(Eureka)'의 맛을 조금이라도 알게 할 것인가,
수학 수업 한 시간 동안 자기 자신이 배우고 느낀 것들을 어떻게 기록으로 남겨 놓게 할 것인가를
고민한 결과물이 학습지인데,
그러다 보니 학습지에는 빈칸이 점점 더 많아졌습니다.
학생들은 수학 수업을 들으면서 학습지의 빈칸들이 채워지는 것을 경험하고,
무언가 자신이 스스로 배움을 만들어 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으면 더 없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침묵으로 가르치기(Teaching with Your Mouth Shut)>(도널드 핀켈, 다산초당)라는 책도 있지요.
"배움의 기억에 '선생님'은 없다."
오해의 여지가 있을 수 있는 이 문장이 강조하는 것은,
그래서 좋은 교육이란,
교사의 가르침(teaching)이 아니라 학생의 배움(learning)을 제일의 자리에 올려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20여년 동안 변하지 않는 것은, 수학 수업 시간에 노트 필기를 중시한다는 것입니다.
중학교 1학년 학생들은 필기하는 것을 정말 힘들어 합니다.
핸드폰으로 소통하고, 노트북으로 타이핑하는 시대에 손글씨라니요.
중학교 1학년 어떤 학생들 말이,
"필기를 하다 보면, 어느새 선생님 말이 안 들이고,
선생님 말을 듣다 보면, 필기를 놓치고..." 그런다는 겁니다.
그래서 중학교 1학년 수업 때 가장 많이 듣는 말은, ‘빨라요!!’ 입니다.
가뜩이나 중학교 수학을 이해하기도 벅찬데, 노트 필기까지 하라고 하니... 죽을 맛일 겁니다.
저는 한 학년 전체가 2학급으로, 총 6학급인 작은 중학교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습니다.
중학교 3년을 내리 저에게만 수학을 배운 학생들이 있었는데,
그 학생들의 3년간의 변화를 운 좋게도 보게 되었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그렇게 필기를 어려워 하던 학생들이 중학교 2학년이 되면 곧잘 합니다.
중학교 3학년이 되면, 눈으로는 선생님을 보고, 귀로는 선생님의 말을 들으면서도
손으로는 필기까지 잘 하는, 그야말로 '필기 도사'가 되어 있곤 했습니다.
뇌과학자들은 말합니다. 손이 얼마나 뇌의 활동에 큰 역할을 하는지 주목해야 한다고.
제가 참 좋아하는 책, <장인( The Craftsman) >(리처드 세넷, 21세기북스)에서도
'지능적인 손'에 대해 말합니다.
컴퓨터 시대에 여전히 손으로 노트 필기하는 것이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같이 보일지 모르지만,
그 학생의 학습력 향상에 분명 영향을 미치리라고 점점 더 확신하게 됩니다.
수학 학습지에 날짜를 꼭 적습니다.
날짜를 가지고 할 이야기가 참 많습니다.
오늘 누구의 생일인지에 대해서 얘기할 수도 있고,
역사적 사건을 잠깐이라도 언급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숫자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6일이면, 6은 가장 작은 완전수이니까, 완벽하게 수업들어 달라고 부탁하지요,
17일도 중요합니다. 17은 소수이기도 하고,
정17각형은, 가우스가 증명했듯이, 작도 가능한 도형이기도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17일은 담임샘 월급날임을 밝힙니다.
그러면 똘똘한 학생은, 수학샘 월급날이기도 하다는 걸 금새 눈치채지요.
중학교 45분의 수학 수업 시간 동안 학생들은, 노트 2쪽을 완성합니다.
왼쪽에는 받은 학습지의 빈칸을 채워나가고, 오른쪽에는 수업 중 설명을 자유롭게 필기힙니다.
그렇게 매 수학 수업 시간마다 2쪽씩,
1년이 지나면, 수학 노트는 교과서보다도 더 두껍게 됩니다.
내가 만든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나만의 수학책'이 되는 것이지요.
수학 노트 검사도 당연히 합니다.
단,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글씨체는 결코 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글씨를 아무리 못 써도, 수업 내용이 잘 담겨 있으면 무조건 '오케이' 입니다.
노트 필기할 때, 색깔 펜을 써 달라고 부탁하기도 하고,
저도 칠판에 판서할 때, 가능한 색색깔의 분필을 사용하려고 노력합니다.
중요도를 나타내는 여러 기호도 사용합니다.
별표, 왕별표, 반짝이는 별표, 검은 별표 등등...
수학 노트에 수업 시간 중에 실시했던 쪽지 시험지도 모두 붙이게 하고,
각종 활동지도 수학 노트에 모두 모아 놓게 합니다.
그야말로 수업 시간에 한 모든 것들이 수학 노트 한 권에 다 들어가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모아 놓는 습관도 중학교에서 길러야 할 필수적 습관이기도 하지요.
물론 이 수학 노트는 '나만의 수학 교과서 만들기’라는 이름으로 수행평가에 당연히 반영됩니다.
무엇보다도 수학 공책에 오늘의 수업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에
집에서 복습하기도, 시험에 대비하기도 좋습니다.
어쨌든 이런 저런 이유들 때문에 수업 시간에 수학 노트를 고집하고 있습니다.
학년 말에 학생들에게 말합니다.
이 수학 노트를 잘 간직하고 있다가,
혹 나중에 결혼해서 낳은 자식이, "아빠 엄마는 수학 잘 했어요?"라고 묻거든,
그 때 이 수학 노트를 보여주라고요.
수학 공부 열심히 했던 확실한 증거가 될 거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