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샀다.
그냥 보고 싶어서.
거리를 물들인 울긋불긋 단풍이면 충분할 텐데 뭔가 성에 안 찼다. 외출 후 돌아오는 길에 태화강 국가정원의 국화가 자연스럽게 생각났다. 눈에 아른거리는 국화물결이 그리워 지하철역 부근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설레는 마음으로.
동네 카페에 올라온 대로 중년의 꽃 파는 아저씨가 지하철역 부근에 앉아 계셨다. 생각보다 종류가 많지 않았다. 핑크색 장미, 흰색국화와 핑크색 국화, 낯선 보라색 카라가 전부였다. 주로 월수금 특히 금요일에 종류가 많다고 소개하는 정감 있는 아저씨와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장미 한 다발에 6천 원, 국화는 5천 원. 망설임 없이 태화강 국화를 닮은 핑크 국화다발을 샀다.
식탁에 놓았다. 딸아이만 학교에서 돌아와 아는 체했다. 그게 다였다. 그러다가 걸리적거리는 느낌이 들어 주방으로 옮겼다. 저녁 내내 남편도 아들도 말 한마디 꺼내지 않았다. 눈에 안 들어온다는 게 신기했다.
내가 보고 싶어 산 꽃이지만,
"꽃이네!" 하고 불러주는 이가 없는 것을 보며 꽃에게 미안했다. 식구들에게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존재감이 없었다. 좋아하는 사람만 좋아하면 됐지 뭐, 오롯이 나만 독차지하게 되었다. 오며 가며 눈을 마주친다. 평소에도 꽃에 관심 없는 남자들이라 그려려니 했다. 꽃선물조차 받아본 적이 없으니까. 가끔 내가 나에게 선물하며 살고 있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감성적이 되어가는 나를 발견한다. 지난 추석, 서로의 MBTI 유형에 대해 이야기하다 남동생이 아이들 앞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희 엄마, T야. 우리 집 식구 다 T잖아!"
그 자리에서는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난 T로 살았던 것 같다. 그저 학업에, 일에 치여 리액션이나 감성적 표현을 드러내는 일 없이 무뚝뚝하게 사는 게 당연한 줄 알았다. 부끄러움이 많은 성격 또한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러던 나인데, 나이가 들면서 차츰 F 쪽으로 추가 이동하고 있다. 어쩌면 칼로 무 베듯, T로 F로 싹둑 가르기 어려운 게 아닐까? 내 속의 억눌렸던 감정이 이제야 마음 놓고 고개를 슬그머니 드는지도 모른다. 이런 성격 유형분석을 맹신하지 않지만 요즘 애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는 그 어중간한 사이에서 마음 가는 대로 살기 시작했다. 그게 나이 들었다는 증거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