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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에 새겨진 기억

3) 유전자는 네가 한 일을 다 알고 있다.

by 오순영


모든 물질이 중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모든 생명체도 벗어날 수 없는 생존 법칙이 있는데 그것이 ‘행한 만큼 받는다.’는 것이다. 동물 실험에서 보았듯이 방치가 방치를 낳았고 학대가 학대를 낳았는데 이러한 일은 인간사회에도 당연하게 벌어지고 있다. 거짓말을 하면 거짓말을 당하고, 폭력을 휘두르면 폭력을 당한다. 모함하면 모함당하고, 도둑질하면 도둑질당한다. 당장의 쾌락을 위해 마약, 술, 도박에 탐닉하는 자는 건강을 잃거나, 재산을 잃거나, 사회에서 배척당한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개인과 사회에 후성유전이 깊게 관여하기 때문이다. 실험실에서 방치 학대당한 새끼의 스트레스 호르몬은 만성적으로 높았다. 대표적인 스트레스 호르몬 코티솔은 혈압, 당뇨, 면역 저하, 노화가속, 성호르몬 분비 약화, 우울, 불안을 야기한다. 코티솔이 체내에 많으면 그것을 뇌의 해마에서 감지한다. 해마는 뇌하수체에서 ACTH(부신피질자극호르몬)의 분비를 억제하여 부신에서의 코티솔 분비를 막는데, 만성적인 스트레스는 이 되먹이기 기전이 고장 나 있다. 방치되어 자란 새끼는 사회성이 떨어져 외톨이가 되었으며 짝을 만나는 것도 어려웠고 성교도 잘하지 못하였다. 부모로부터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아 동물원에서 사람 손에 의해 키워진 대부분의 동물들은 자연에서 자유롭게 사는 동물에 비해 생식력이 현격히 떨어져 있다.

사람이 악행을 저지르면 걱정 근심이 생긴다. 악행은 뇌세포에 기억으로만 새겨지는 것이 아니라 유전자에도 새겨진다. 악행을 저지르면 저지를수록 더 깊게 새겨져서 자손에게 유전된다. 악행을 저지를 때 생기는 가책과 근심은 스트레스를 유발하고, 코티솔, 노르에피네프린 등의 스트레스 호르몬 분비를 야기한다. 악행자의 표정은 어둡고 음습하며 비굴하거나 혹은 험상궂다. 품위가 없고 언행이 반듯하지 못하며 목소리 맑거나 우렁차지 못하다. 스트레스 호르몬이 DNA의 메틸화, 히스톤 단백의 변형, 비암호와 RNA 등 후성유전의 메커니즘을 작동시켜서 세포 내 효소, 호르몬, 뇌신경전달물질, 단백질의 변화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결코 걸리지 않았을 여러 질환에 시달리고, 성격은 급하고 잔인해지는 것이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유전자를 갖고 똑같이 태어났지만, 인간 괴물이 된다. 이 인간 괴물이 제도의 허점을 이용하여 부와 권력을 잡기도 한다. 법을 어기기 위해 법을 공부하여 법 전문가가 되면 누구도 없앨 수 없는 불가살의 존재가 되기도 하며, 겉으로는 대중을 위하는 척하고 언론을 장악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대중으로부터 인기와 지지를 받는다. 그들이 득세하는 세상은 외면으로는 화려하지만, 속으로는 디스토피아가 진행되어 감시와 통제가 만연하나 대부분은 저항하지 않은 채 적응하며 살며, 모래알갱이처럼 유대감이 없이 살아 자살자가 많고, 결혼도 않고 이이를 낳지 않는다.


쥐의 실험에서 아세토페논 같이 좋은 먹이 냄새도 전기 충격과 같이 주면 공포의 냄새가 되었고, 그것이 자식에게 유전되었다. 이를 쥐의 집단에 가하면 쥐 집단 전체가 그렇게 될 것이다. 2차 대전 때 2만 명이 아사할 정도로 극심한 기아에 시달린 네덜란드인의 자녀들이 그 후 60년 동안 여러 가지 건강상 문제로 고통을 받은 것처럼, 집단에 가해진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아픈 기억들은 사회전반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후성유전은 비가역적인 것이 아니라 가역적이라는 것이다. 그 후로 네덜란드인은 건강에 각별히 신경을 써서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큰 나라가 되었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암 환자가 건강식단, 명상, 긍정적인 생각, 자연친화적인 생활만으로 완치된 사례도 있다. 소년 시절 방치와 학대당했던 경험이 긍정적으로 작용하여 자식에게 더 헌신적인 부모로 성장한 경우도 있다.


인간 세포 50조 개 속에 똑같이 들어있는 유전자는 한 인간을 만드는 본질이지만, 결코 그의 운명을 결정하지는 못한다. 유전자는 앞은 사자, 가운데는 염소, 뒤는 뱀인 키메라처럼 과거이자, 현재며 미래다. 원인이자 과정이며 결과고, 이미 만들어진 설계도이자 물건을 만드는 연장으로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진다. 유전자는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먹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 다 알고 있다. 그것을 통해 한 인간과 사회를 만들고, 또 변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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