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D 왓슨
제임스 왓슨이 향년 97세의 일기로 지난 11월 6일 사망하였다. 제임스 왓슨은 프랜시스 크릭과 함께 DNA 구조를 규명하여 생명현상의 미스터리를 푸는 단서를 처음으로 인류에 제공한 인물이다. 엄청난 변화와 변혁을 이끌어낸 계기가 되었던 발견과 발명의 역사 속에서도 왓슨과 크릭은 단연 돋보인다. 그들로 인해 우리는 매일 식탁에서 수많은 종류의 GMO 식품을 접하게 되었다. 전 세계 수십억 인구가 유전자 편집 기술로 만들어진 mRNA 코로나 백신을 맞게 된 것도 이들이 없었으면 없었을 일이다. 이제까지 불치병으로 여겨 포기해야만 했던 희귀 유전병과 암 질환에 대한 완치의 희망과, 유전자 조작이 가져올 부작용에 대한 걱정을 동시에 갖게 된 것도 이들 때문이다.
왓슨은 1928년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영특하여 15세에 시카고 대학에 입학하였고 22살에 동물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박사 후 연구를 위해 영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는데 케임브리지 대학교 캐번디시 대학에서 운명의 파트너 물리학자 크릭을 만났다. 둘은 DNA 구조 문제를 푸는데 몰두하였으며 최적의 조합이었다. 그러던 중 런던 킹스칼리지 연구소의 젊은 여성 물리학자 로잘린드 프랭클린이 X-선 회절기법으로 촬영한 DNA 사진(photograph 51)에서 힌트를 얻어 DNA가 이중 나선 구조로 돼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연구 결과를 1953년 그의 나이 25세 때 네이처에 발표하였으며, 1962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1968년 하버드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중 자신의 사무실에서 일하던 20년 연하의 의대생 엘리자베스 루이스 왓슨과 결혼하였다. 그는 결혼을 갈망하였으면서도 매우 신중하게 결혼 상대를 물색했다고 자신의 회고록에 밝힌 바 있다. 왓슨은 결혼한 그해 롱아일랜드의 콜드 스프링 하버 연구소로 자리를 옮겨 소장에 취임했다. 이후로 근 60년 동안을 연구소 부지 내 사택에서 살았다. 부부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 아들이 조현병 환자였다. 부부가 헤어지지 않고 60년 간 한 곳에서 격리나 다름없는 삶을 산 것은 조현병 아들을 둔 것 이 크게 한몫했을 것이다. 콜드 스프링 하버 연구소는 실은 미국의 우생학자로서 독일 나치에 큰 영향을 미친 찰스 대본포트가 세운 연구소가 전신이다. 왓슨은 그런 연구소를 암 연구와 분자 생물학의 세계적인 중심으로 변모시켰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 재직하던 중 여려 차례 인종차별과 우생학적 발언을 하여 구설수에 올랐다.
문제의 시발점은 2003년 DNA 구조 규명 50주년을 기념하여 PBS와 BBC가 제작한 다큐멘터리에서 그가 한 인터뷰다. 그는 유전 공학이 언젠가는 지능이 낮은 사람들을 ‘치료’하는 데 사용되어야 하고, 아둔함은 일종의 질병이라고 말했다. 또한 유전자 편집이 사람들의 외모 향상에도 사용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사람들은 세상 모든 여자가 예뻐진다면 끔찍할 거라고들 하는데 난 아주 좋을 것 같거든요.”라고 하였다. 그의 말은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되었고 결국 하버 연구소 소장 직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2007년 왓슨은 지능을 인종과 연관 지으면서 결국 선을 넘었다. 그는 『지루한 사람과 어울리지 마라』라는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썼다. “아프리카의 전망에 대해 본질적으로 회의적이다. 우리의 모든 정책은 저들의 지능이 우리와 동등하다는 전제하에 세워지는데, 실제 검사를 해보면 모두 사실이 아니라고 나온다. 모든 사람이 동등하기를 희망하지만 흑인 직원과 일해 본 사람은 그게 사실이 아님을 알 것이라고 했다.
2018년 PBS 방송에서 ‘미국의 거장들’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였는데 그중 한편에 제임스 왓슨이 포함되었다. 왓슨의 업적, 생애, 논란이 된 관점들, 그리고 아내와 조현병을 견뎌내며 살아가는 48세의 아들 루퍼스가 함께 출현하였다. 그런데 과거 논란을 철회 혹은 번복할 기회가 왔음에도 자신의 생각을 조금도 바꾸지 않고 피력했다. ‘흑인과 백인의 평균 지능에서는 분명 차이가 있죠, 나는 그 차이가 유전자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이중나선을 찾는 시합에서 이긴 사람은 유전자를 중요하게 여길 수밖에 없어요. 놀랄 일도 아니잖습니까? “라고 하였다.
소장직에서 물러난 2003년부터 왓슨은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2007년의 인종 차별적 발언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결정타가 되었다. 미국과 영국 학계에서 질타를 받고 매장당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어 강연과 명예직에서 오는 수입이 끊겨버렸다. 그는 하는 수 없이 2014년 12월 생존한 노벨상 수상자로서는 최초로 자신의 메달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 내놓았다. 낙찰가는 예상가를 훨씬 넘어 410만 달러나 되었다. 낙찰자는 러시아의 억만장자 사업가인 알리셰르 우마노프였다. 그런데 그는 낙찰받은 후 놀라운 발표를 하였다. “위대한 업적을 남긴 과학자가 자신의 업적을 인정한 메달을 팔아야 하는 상황은 용납할 수 없다. 왓슨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생물학자다. DNA구조 발견에 대한 공로로 인정된 이 메달은 주인에게 속해야 하는 것이 정당하다.”며 낙찰받은 메달을 왓슨에게 돌려주었다.
2018년 왓슨은 어느 학회에서 참석하고 홀로 운전하여 귀가하던 중에 도로에서 미끄러져 6미터 아래로 추락하였다. 그는 사고로 뇌를 크게 다쳐 헬리콥터로 병원에 이송되어 수술을 받았다. 교통사고가 실수로 발생했는지, 누군가의 가해에 의해 발생했는지 밝혀지지는 않았다. 그는 사고 이후 건강이 악화되어 시설에서 요양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2025년 11월 6일 롱아일랜드에 있는 호스피스 시설에서 사망하였다. 전반적 건강 쇠퇴상태에서 감염이 발생한 것이 사망 원인으로 추정되었다. 짧은 투병 끝에 사망하였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아내 엘리자베스와 둘째 아들인 던컨 왓슨이 임종을 지켰으며 아들은 추모사에서 다음같이 말했다. “아버지는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싸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