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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에 새겨진 기억

2) 타고난 것인가? 아니면 경험에 의한 것인가?

by 오순영



네덜란드인은 남녀 모두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큰 것으로 유명하다. 남자는 평균 183cm, 여성은 169cm이다. 그런데 19세기 초반에 남성 평균은 163cm이었고 후반에 들어서 170cm 되었다. 20세기 전반까지 이 키가 계속되다가 1960년대부터 갑자기 커져 평균 180cm이 되었는데, 유제품의 풍부한 섭취, 소득 수준의 향상, 빈부격차의 축소, 남녀평등 같은 환경적인 요인 때문이었다. 환경 요인이 키 성장 유전자 스위치를 켜서 발현시킨 것이다. 그런데 2000년 이후 출생한 네덜란드인은 1980년대 출생한 부모 세대보다 평균 1cm 작다고 한다. 그러니 유전자가 작동하더라도 무한정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한계가 있다는 말이다.

큰 키 말고도 네덜란드는 후성유전학에서 반드시 언급되는 부분을 한 가지 더 갖고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식량공급 차단으로 네덜란드 서부지역에서 대규모 기근이 발생하였는데 그 결과 2만여 명이 아사하였다. 기근의 시작과 종결이 명확한 점, 동부지역은 기근이 없었기에 대조군이 명확한 점, 그리고 뭐든 꼼꼼하게 기록하는 네덜란드인의 성향 덕택으로 기근이 후세의 육체적 정신적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연구를 할 수 있었다. 엄마의 자궁 속에서 기근을 경험한 아이들은 확실하게 저체중아가 많았다. 1960년대 이들이 군에 입대를 할 때 신체검사를 하였는데 기근을 경험하지 않은 산모의 아이보다 비만이 2배나 많았다. 조현병과 우울증도 유의하게 많았다. 1990년대 이들이 나이 50이 되었을 때 조사를 하였는데 특히 비만이 더 많았으며, 그로 인해 고혈압, 당뇨, 심혈관질환도 많았다. 2000년까지 연구가 진행되었다. 기근은 60년 넘도록 건강에 나쁜 쪽으로 영향을 미쳤다. 여성에게는 유방암의 발생률이 높았고, 비만 고혈압 당뇨 심장병이 기근을 겪지 않은 사람들보다 많았다. 이 같은 만성 성인병 질환이 태어나기 전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후성 유전을 뚜렷이 보여주는 또 다른 흥미로운 실험이 있다. 이 실험 논문은 2014년 Nature Neuroscience 지에 실렸다. 저자들은 아세토페논 냄새(과일 향)를 퍼뜨리는 동시에 발에 전기 자극을 주어 쥐가 아세토페논 냄새를 두려워하게 만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쥐들은 이 향을 맡을 때마다 깜짝 놀라게 됐다. 그 후 이 쥐들을 교배했더니 자식 쥐들도 향을 맡으면 깜짝 놀랐다. 이 자식 쥐들을 다시 교배했더니 그 자식 또한 향에 두려움을 느꼈다. 이들 쥐의 뇌를 해부하자 향에 반응하는 수용체가 보통 쥐보다 크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또한 정자 DNA를 분석하자 향에 대한 공포를 학습한 쥐의 정자 DNA가 다른 쥐의 정자 DNA와 다르게 메틸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저자들은 쥐가 부모로부터 공포를 학습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해 아세토페논 향에 대한 공포를 학습한 수컷 쥐의 정자를 다른 실험실 암컷 쥐에게 인공수정시켜 보았다. 이렇게 태어난 자손의 뇌를 해부하자 이번에도 향에 반응하는 수용체가 보통 쥐보다 컸다. 한 세대가 학습한 특정한 공포가 발현을 조절하는 메틸화 패턴으로 DNA에 새겨져 다음 세대에 전달된 것이다. 한 세대가 겪은 공포, 두려움은 다음 세대에 유전된다는 것이 실험으로 증명되었다.


모성애가 선천적인지, 경험에 의한 것인지 알아보는 실험과 어미 쥐의 양육 태도에 따른 새끼 쥐의 스트레스 반응에 관한 실험이 있었는데 그 결과가 다소 충격적이다. 설치류와 영장류의 모성애는 젖먹이 때의 경험에 따라 결정된다는 결과를 보여주었다. 설치류와 영장류의 새끼 돌봄 행동은 핥기와 털 고르기가 중요한데 생후 일주일 동안 어미로부터 이 돌봄 행동을 경험하지 못한 쥐와 원숭이는 자신의 새끼에게도 돌봄의 행동을 하지 않았다. 생후 일주일 동안 어미로부터 잘 돌봄을 받았던 쥐와 원숭이는 돌봄의 형질을 획득하였고, 그것이 평생 지속되었으나, 그렇지 못한 새끼들은 돌봄의 형질을 획득하지 못했으며 그것이 평생 지속되었다. 돌봄을 받지 못한 새끼들은 또한 스트레스 호르몬 분비가 만성적으로 많았는데 이는 해마의 스트레스 호르몬에 대한 감수성이 떨어져서 뇌하수체-부신수질로 이어지는 스트레스 호르몬 조절 기능이 망가졌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새끼를 잘 핥아 주지 않는 어미로부터 태어난 쥐를 잘 핥아주는 쥐에 키우게 하고, 잘 핥아주는 어미로부터 태어난 쥐를 핥아주지 않는 쥐에게 키우게 하여 결과를 보았더니 어떤 쥐든 간에 잘 핥아주는 어미가 키운 쥐가 새끼를 잘 핥아주는 쥐로 성장하였다. 설치류의 양육태도는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새끼 때 받은 돌봄이 좋았는지 나빴는지 경험에 의해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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