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와주는 힘
첫 아이를 갖고 나서 병원에서 처음 심장 소리를 들었을 때가 기억난다.
'두근, 두근'
그 순간을 표현하기는 참 어려운 것 같다. 1~2분 정도의 짧은 시간이지만 병원에 올 때마다 이 시간이 무척 기다려졌다. 한 생명이 태어나 자라는 것은 참 신비로운 일이었다.
병원을 가기 위해 연차 휴가를 자주 써야 했다. 주말에 가도 되지만 병원에서는 평일에 오는 것을 권장하였다. 주말엔 사람들이 많아서 예약하기 어렵고 대기 시간도 길기 때문이다. 조금씩 자라고 있는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행복으로 물들었다. 점점 걸어 다니기 힘들어하는 아내를 보면 미안하고, 잘 이겨나가는 모습이 또 고마웠다.
다운증후군 검사를 받을 때가 기억난다. 걱정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지만 검사 결과를 받는 날엔 조금 조마조마했다. 정상이라고 들었을 때는 참 감사하였다. 그렇게 엄마 뱃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던 아이는 새해가 밝고 며칠이 조금 지나서 세상으로 나왔다. 응애응애 하며 우는 아이를 안고 있는데 너무 조심스러웠다. 재빨리 사진을 찍어서 제일 잘 나온 것으로 주위 분들에게 보내 드렸다. 장모님은 조금 더 예쁜 사진을 보내지 하셨지만 내겐 너무나 예뻐 보였다. (사실 모든 사진들이 다 예뻤다.)
우리는 산후조리원을 가지 않았다. 장모님께서 아이를 씻기고 아내가 몸을 챙기는 것을 도와주셨다. 나는 회사로 복귀했고 직원들로부터 많은 축하 인사를 들었다. "이제 잠은 다 잤네" "축하해, 고생 시작이네" "아기가 너무 예쁘다"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도 아이의 모습이 많이 그려졌다. 틈이 날 때 아내에게 화상 통화를 하며 아이를 보았다. 퇴근하고 집에 가면 새근새근 누워있는 모습이 정말 천사였다. 똥을 싸도 하나도 냄새가 안 났다. 전혀 더럽지가 않았다. (그러다 이유식을 먹기 시작하면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밥을 먹는 순간 익숙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아이가 특별한 일 없이 계속 건강하게 자랄 줄 알았다. 생후 11개월이 되었을 때, 아내의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장례식장에서 일을 도와드리고 집으로 왔는데 아내가 아이의 배 아래에 무언가 만져지는 것 같다고 하였다. 나도 만져보니 딱딱한 게 있는 것 같았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탈장일 수 있다고 하였다. 다음날 병원을 방문했는데 사람이 많아서 진료를 바로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응급실을 지나가는데 마침 문이 열렸고 안에 있는 직원과 마주쳤다. 엉겁결에 응급실에서 별다른 비용을 들이지 않고 검사를 받았다. (그분들이 보기에 갓난아기를 안고 어쩔 줄 몰라하는 엄마 아빠의 모습이 비쳤던 것 같다.) 검사 결과는 탈장이었고, 다음 날 바로 수술 일정을 잡았다.
아직 돌도 지나지 않은 아기가 수술을 한다고 생각하니 너무 당황스럽고 걱정되었다. 소아청소년과 병원을 운영하시는 지인이 계셔서 연락해 보았는데 탈장 수술은 심각한 수술이 아니기에 병원 지침에 따르면 된다고 하였다. 그때가 12월 초였다.
추운 날씨 속에 새벽 6시에 병원에 도착했다. 병원에서는 아이를 굉장히 얇은 옷으로 갈아입혔다. 너무 추워 보였다. 그리고 큰 바늘을 아이 팔목에 꽂는데 아이가 너무 많이 울었다. 주삿바늘이 잘 안 꽂히는지 간호사가 한 번에 하지 못했다. 아내 말로는 아기를 낳을 때 저런 바늘을 꽂았었는데 너무 아팠었다고 하였다. 아이 손에 주삿바늘을 두 번, 세 번 꽂는 간호사를 보며 너무 화가 났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혹시 아이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길까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나 수술실로 내려갔다. 침대에 누워있는 아이의 손을 꼭 잡고 갔다.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수술동의서에 서명을 하였다. 수술 후 혹시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하더라도 병원에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곳에 서명을 하였다. 아이가 수술실에 들어가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이에게 혹시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아무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동의서에 서명하는 것 밖에 없었다. 아이는 많이 울며 수술실로 들어갔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는데 눈물이 나왔다. 수술 상황을 보여주는 모니터가 있었다. 30대, 40대의 환자가 두 명 있었고, 11개월 된 우리 아이가 있었다.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는데 말을 하려고 입을 떼는 순간 눈물이 다시 왈칵 나왔다.
1시간이 안 걸릴 거라고 했었는데 2시간이 넘어서 수술이 끝났다. 의사 선생님은 수술이 잘 되었다고 하셨다. 너무 다행이었다. 아내는 아이와 함께 일반 병실로 갔다. 나는 장모님과 교대하고 병원에서 나와서 회사로 갔다. 발걸음이 잘 떼이지 않았지만 그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회사로 가며 수술이 잘 되어서 감사하다고 기도하였다.
업무를 다 보고 퇴근할 무렵에 아내에게서 연락이 왔다. 다행히 열이 떨어지고 오줌도 누었다고 했다. 간혹 수술 후 오줌을 못 누는 경우가 있다고 하는데 다행히 쉬를 했다고 하였다. 다음날 건강히 퇴원하였다. 그리고 하루 뒤에 돌 사진을 찍으러 갔다. (돌사진을 찍기로 예약을 해놓은 상태였었다.) 수술을 한 지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었지만 아이 상태가 참 좋았었다. 그렇게 감사하게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일이 훨씬 많은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저는 도움이 필요합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을 넘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힘이 있어 참 감사합니다.
이번 시간에는 MaaS (Mobility as a Service, 서비스형 이동수단)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산업 배경을 간단히 짚어보겠습니다. 자동차 산업은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현재 도요타가 가장 많은 시장 점유율을 갖고 있습니다. (약 10%) 그리고 현대자동차는 Top 10 업체에서 가장 짧은 역사를 (1967년 설립) 갖고 있습니다. 완성차 시장은 수익을 내기까지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요구되고, 비용을 회수하기까지 약 20년이 소요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항상 사람이 직접 차를 운전하는 개념이 바탕에 깔려 있었습니다. 그러다 전동화, 자율주행, 통신 성능 및 공유 서비스의 급성장으로 큰 변화가 도래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자동차 제조사들은 차를 파는 데만 관심이 있었지, 어떻게 이용하는지에 대해선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차량은 서비스를 위한 기본 제공품의 역할로 전환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마치 애플이 스마트폰을 개발하였지만 아마존, 구글, 페이스북, 카카오톡과 같이 데이터 플랫폼 기업들의 급격한 성장이 있었던 것처럼 말이죠.
거대 IT 업체들은 데이터를 분석, 가공하여 막대한 이익 창출과 발전을 해오고 있으며 풍부한 경험이 축적되어 있습니다. 이런 현상과 함께 나타난 용어가 MaaS입니다. 제조에서 서비스로 모빌리티 (Mobility) 패러다임이 변화되고 있습니다. 다양한 이동 수단을 하나의 플랫폼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사용자와 교통수단의 효율화로 비용 절감을 추진 중인 공공 기관의 니즈도 부합되고 있습니다. (지하철과 버스 결제의 통합도 작은 개념의 MaaS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장기적으로 공유의 개념이 확대되면서 전체 차량 시장은 정체되는 반면에 회전율이 상승하면서 서비스 시장은 확대되고 있습니다. 기존 완성차 중심의 자동차 비즈니스는 수익 약화가 불가피한 상황입니다. 점점 단순한 제조업이 아닌 소프트웨어 경쟁력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현대차 그룹에서는 승용차, 상용차, 로봇, 항공 모빌리티 장치 및 에너지 관리 시스템을 포함하는 스마트 모빌리티 장치의 네트워크를 개발할 것이라고 발표를 했었습니다. 기존의 자동차 제조사들은 변화하지 않는다면 결국 서비스 수요를 확보하고 있는 기업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