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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슬호 Feb 27. 2022

풍족한 여행은 아니지만

런던

빛 좋은 개살구


런던의 높은 물가로 우리는 주로 길거리 음식을 이용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시장은 먹거리 천국이었다. 입구에서부터 여러 음식이 침샘을 자극했고, 고민만으로 행복해졌다. 뜨거운 기름 속에서 지글거리며 바삭한 섬나라의 자존심 해산물 튀김이 눈앞에 있었다. 그래, 바로 너다!


스몰 사이즈가 5파운드라니, 살짝 놀랐지만 그래도 한 번 먹어 보자며 구입했다. "와 진짜 손바닥만 하네" 한 번 더 당황했지만 서둘러 하나씩 집었다.


손에 닿는 촉감이 뭔가 서늘했다. 혀에 닿는 온도는 뭔가 차가웠다. 바삭한 소리가 아닌 눅진한 기름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너 방금 튀겨진 거 아니었어..?' 빛 좋은 개살구가 딱 이런 거구나 싶었다.


미끄덩한 입 안이 개운해지길 바라며 과일가게로 눈을 돌렸는데, 달콤하게 생긴 작고 귀여운 산딸기가 눈앞에 있었다. "언니! 이건 분명 맛있을 거야 이것도 맛없으면 여기서 더는 사지 말자" 단호해진 나였다.


....... 맛을 보자마자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고 언니를 살폈다. 산딸기가 맹맛이라니, 아무 맛이 나지 않았다. 갈 곳 잃은 손과 흔들리는 눈동자, 더 불쌍해진 혀. 불쌍혀..



씽! 씽!

한국에서 저렴하게 끊어둔 3층 맨 앞 좌석은 허리를 곧게 펴야만 보이는 자리였다. 언니는 가기 전부터 오페라의 유령이 되어 씽! 씽! 을 엄청나게 외쳐댔고 나는 그에 맞춰 고음 립싱크를 해줬다.

쉬는 시간이 되자 직원들이 하겐다즈 아이스크림을 팔며 돌아다녔는데 작은 하겐다즈 한 컵에 4파운드였다. 4파운드라니! 우리는 하루치 예상 금액을 다 썼기 때문에 여윳돈이 없는 상태였다. 비록 하겐다즈는 먹지 못했지만 언제가 다시 만나자고 마음속 손을 흔들었다.

노래에 담긴 힘은 커서 오페라 유령 노래를 들을 때마다 우린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 하겐다즈는 못 먹지만 씽을 외치던 그 시절로 말이다.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위로가 된다면


옥스퍼드로 향하는 날이었다. 교통 담당인 언니는 티켓을 미리 끊어 뒀는데, 버스 한 대당 딱 한 자리만 나오는 1파운드 특가라고 했다. 비록 다른 버스를 타야 했지만 혼자만의 시간은 처음이라 설레는 마음이 생겼다.

버스정류장에 서 있는 언니에게 "이따 봐"라고 씩씩하게 말한 뒤 먼저 버스에 올랐다. 2층 맨 앞자리에 앉으니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파란 하늘에서 내리쬐는 따스한 햇살, 병정처럼 나란히 늘어선 나무, 양 옆으로 펼쳐진 초록의 잎사귀들.

여행 속 찰나였던 이 순간은 아직까지 짙은 농도로 남아 힘든 날이면 툭, 하고 떠오른다.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위로가 되는 순간이 있다면 조금 많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포근하고 바삭하게


같은 숙소에서 만난 분이 맛있는 피시 앤 칩스 식당을 추천해 주셨다. 짙은 우드톤에 차분한 느낌이 가득한 식당.


높은 의자에 앉아 축구 경기를 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피시 앤 칩스와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감자튀김, 완두콩이 곁들여진 커다란 대구 튀김이 뜨거운 열기를 품은 채 등장했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흰 살 생선. 두툼하고 포슬한 감자튀김을 먹으며 맛 속에 담긴 의미를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저렴한 가격에 포만감이 높아 공장 노동자들이 즐겼다는 영국의 전통 음식. 긴 세월 동안 이 음식으로 따뜻함을 느꼈을 수많은 사람들이 그려졌다. 오늘만큼은 타국에서 온 우리도 뜨거운 피시 앤 칩스를 먹으며 잠시나마 뱃속에 따스함을 채워본다.


음식 속에 담긴 그 나라만의 이야기는 맛을 풍성하게 해주는 조미료가 되곤 한다. 런던에서의 날들이 피시 앤 칩스와 함께 맛있게 소화되는 날이었다.


누군가의 여행

한 달간 런던 여행을 하기 위해 왔다는 분과 같은 숙소에 묵었다. 이곳에 온 지도 벌써 3주째라고 했다. "오늘은 어디 가실 거예요?" 하고 여쭤보면 "음 오늘은 공원에 가서 하루 종일 뒹굴뒹굴하려고요"라는 차분한 대답이 마음 한구석을 잔잔히 달궜다. 찰나의 순간조차 아까워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우리와 대조되는 여유로움이었다.

한 도시에 오래 머물면서 느지막이 하루를 시작하는 상상을 했다. 마음에 꼭 맞는 도시를 찾았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따뜻한 연결고리

2층 침대가 세 개 놓인 6인실에서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배낭 하나뿐인 지구 반대편에서 매일 밤 따스한 온기를 느꼈는데, 헤어지는 순간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녹초가 된 하루 마무리와 시작이 되어준 곳. 


내가 떠나면 또다시 누군가 머무를 이곳. 내 남은 온기가 이전 온기에 더해져 다음 사람에게도 따뜻함이 되었으면. 이 자리를 거쳐간 이름 모를 이들에게 항상 따뜻함이 함께 하기를.


안녕, 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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