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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슬호 Feb 25. 2022

괜찮아, 여긴 런던이야

런던

한 발 늦은 촉

인종차별로 상한 감정은 털어내고 다시 여행에 집중하기로 했다. 부정적인 감정을 계속 쥐고 있으면 남은 하루마저 오염될 가능성이 높아서다. 머리가 복잡할 땐 몸을 움직이는 편이 좋다고 믿는다. 사진으로만 보던 타워브릿지가 시야에 닿자 머릿속이 단순해졌다. 오직 보는 것만 집중하게 되므로.


다리 위에서 사진 찍는 우리에게 한 남자가 말을 걸었다. 카메라를 건네며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여행에서 사진은 현재를 새겨놓는 유일한 방법이 된다. 사진 속에선 그날의 날씨와 풍경, 입었던 옷, 가장 젊은 때가 바래지 않는다. 카메라로 찰나를 소중히 담는 사람은 되돌릴 수 없는 시절을 그리워해 본 적 있기 때문 아닐까. 잠깐의 귀찮음을 감수하고서라도 말이다. 잠시 멈추어 찍던 때는 그렇게 계속 곱씹어진다. 나는 그의 지금이 좋은 기억으로 남길 바라며 집중해서 셔터를 눌렀다.


갑자기 그가 함께 찍는 것을 제안했다. 순간 '왜?'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그냥 스쳐 지나갈 사람과도 추억하고 싶어지는 무언가가 여행에는 있다고 생각했다. 이 사람도 그런 마음이겠구나 싶어 우리는 기분 좋게 응했다. 한 명씩 찍자는 그의 주도하에 언니가 먼저 카메라를 받아 들고 나는 그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카메라가 찍히는 순간, 나는 브이를 했고 그는 몸을 빠르게 움직였다. 후다닥 덥석- 털복숭이 팔이 내 양 어깨를 조였다. 콧구멍에서 새어 나온 숨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가 나를 뒤에서 꼭 끌어안으며 뺨을 가까이 대고 있었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백허그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중동 남성에게 당하다니 눈 뜨고 코 베이는 심정이 이런 거구나 싶었다. 온몸의 털들이 곤두서는 것이 느껴졌다. 맨 살에 닿는 그의 살과 털들이 찐득하고 습했다. 본능적으로 뿌리치려고 팔에 힘을 줬지만 그가 힘을 꽉 주고 있어서 꼼짝할 수 없었다. 놀란 언니는 얼떨결에 손에 든 핸드폰 카메라 버튼을 눌렀고 그의 품에서 떨어지고자 몸을 비튼 채로 찍힌 사진만 남게 되었다. 그의 능수능란하고 뻔뻔한 태도는 한두 번 해본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시간 있냐고 묻는 그놈에게 바쁘다고 말한 뒤 재빨리 다리를 건넜다. 정신없이 걷고 나서야 호흡을 가다듬고 더러움을 털어냈다. 어느새 타워브릿지가 저 멀리 있었다. "사진 찍는데 왜 뒤에서 껴안는 거야?? 옷차림 때문인가" 괜히 민소매 입은 나를 탓했다. 피해당한 쪽은 늘 자신을 되돌아보는 버릇이 있는 듯했다. "아니, 그럼 꽁꽁 싸매고 다니게? 저 변태가 문제지" 언니는 화살이 나에게로 향하는 것을 막아주었다. 그저 무얼 입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안전한 사회가 되길 바랐다. 그거면 충분할 것 같았다.




우연일까 악연일까

공사 중이 아닌 온전한 빅벤을 만나기 어렵다고 하는데 우리의 런던은 그 어려운 순간이 들이 맞는 때였다. 반짝이는 빅벤에 취해 정신없이 셔터를 눌렀다. 우리는 검은 그림자가 되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템즈강의 저녁 향기와 차가운 바람이 머리칼을 쓸어내리던 찰나, 등 뒤로 또 다른 그림자가 느껴졌다. 하나가 아니었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자 입이 귀까지 찢어진 얼굴과 눈이 마주쳤고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한 발자국 물러선 곳엔 처키와 삐에로가 나타났다. 지금 서 있는 곳이 어둠의 거리처럼 느껴졌다. 괴물 네 명은 동그랗게 모여 주위를 에워쌌다.


언니와 나는 그들 사이를 뚫고 나와 온 힘을 다해 달렸다. 이 턱까지 차오른 후에야 멈추었다. 뒤돌아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자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흐르는 땀을 닦으며 언니에게 말했다. "원래 여행이 이런 건가..?" 그들이 분장을 하고 관광객들과 사진 찍어주는 일을 하는 건지, 아니면 친구들끼리 분장을 하고 놀러 온 건지 알 수 없지만 빅벤으로부터 아주 멀어졌다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우리는 그 길로 터덜터덜 걸어 숙소에 돌아왔다. 의도치 않게 야경 일정이 일찍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여행은 계획만으로 되지 않구나. 언니와 나는 그것을 인정하며 서로를 바라봤다.



괜찮아, 여긴 런던이야

런던에서 좋지 않은 일만 일어나니 원래 여행이 이런 건가 하는 의문이 들다가도 인생의 경험치가 조금은 쌓였겠지 하며 위안을 얻기로 했다. 노란 햇살과 대조되는 시원한 바람, 빨간색 버스, 초록한 잔디 위 자유로운 모습을 보니 단단했던 마음은 금세 다시 말랑해졌다. 그것은 마치 3년의 고된 시간을 보상받는 것 같은, 딱 좋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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