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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 Nov 30. 2021

남자 친구에게 물었다

설거지가 쌓인 주방을 보며,


 브런치에 무슨 글을 써야 하나 고민하다 며칠이 지났다. 글을 잘 쓰고 싶은 마음과, 생각만큼 써지지 않는 현실에 괴로워하다가, 그냥 일기장처럼 편하게 쓰기로 맘먹었다. 글 잘 못쓰면 어쩔 건데... 내 공간인데... 그래, 자신감을 갖고 내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보자.


 어느 밤, 갑자기 옥수수전이 해먹고 싶어서 주방을 뒤적거렸다. 일곱 살 아들은 진작 잠들었고, 나 혼자 주방에서 얼쩡거리다 튀김가루와 옥수수캔을 찾았다. 그런데 팬이 없었다. 쌓여있는 설거지 제일 아래층에 갇힌 프라이팬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약간 우울해졌다. 고작 이틀 설거지를 미뤘을 뿐인데 이렇게 산처럼 쌓인다고? 프라이팬만 쏙 꺼내서 설거지하는 내 모습을 상상하다가 약간 자기혐오에 빠져서 털레털레 거실 소파로 걸어가 늘어지게 누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1박 2일간의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남자 친구가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곧 1살이 될 우리 집 개가 발톱 소리를 챡챡챡 내가며 현관으로 뛰어간다. 곧이어 '어이쿠, 잠시만, 삼촌 좀 들어가자~'하고 말하는 남자 친구 목소리가 들렸고, 연신 점프하며 좋다고 핥아대는 개의 뒷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왔어~?"


 "응. 왜 이렇게 힘이 없어?"


 나는 실망한 티를 감추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옥수수 전이 먹고 싶어."


 "들어오면서 보니까 주방에 옥수수캔이랑 튀김가루 있더라."


 "해 먹으려고 했는데... 못 해..."


 "왜?"


 "우리 집 설거지 요정님이 출장을 가셨거든..."


 그제야 주방 상황을 확인한 남자 친구는 후다닥 옷을 갈아입고는 팔을 걷어붙였다.


 "안돼... 하지 마..."


 "뭐를?"


 이 늦은 시간에 출장까지 다녀온 너를 부려먹는 건 내 양심을 더 크게 훼손하는 일이라 뜯어말렸지만 기어이 남자 친구는 설거지를 시작했다. 소파에 늘어진 상태 그대로 나는 더 우울해했다. 한 시간 전에 내가 설거지를 시작했다면 지금쯤 저 아이와 함께 맛난 옥수수 전을 먹고 있을 텐데... 난 대체 왜 이렇게 게으른 거냐...


 나에게 다가와 코를 킁킁대는 개를 본체만체하며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한참을 늘어져있었다. 이윽고 싱크대에서 물 잠그는 소리가 나더니 캔 따는 소리가 났다. 뭔가를 달그락달그락 거리더니 가스 불을 켜고... 거실로 들어오는 애인의 모습이 보였다.


 "야..."


 "응?"


 "무슨 생각 들어?"


 "뭐가?"


 "니가 없으면 설거지도 산처럼 쌓아놓고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는 주제에, 드러누워서 우울해하는 나를 보면 말이야. 무슨 생각이 드냐고."


 옥수수 전 먹고 싶다는 생각이 '설거지를 하지 않는 게으른 나'로 이어져서 우울감에 허우적대는 내 모습은 우리 집에서 낯선 것이 아니다. 어쨌든 나는 수만 가지 이유로 자기혐오에 곧잘 빠지곤 하니까. 어느 순간부터 설거지와 고양이 화장실 청소는 남자 친구의 업무가 되어버렸다. 아니, 진짜 어쩌다 이렇게 된 거람?!


 나는 가만히 남자 친구의 얼굴을 응시했다. 니가 쉽거나 만만해서 이러는 건 아닌데. 나는 왜 항상 너를 이용해 먹는 악당이 되어버리나. 너는 또 왜 고분고분 그걸 받아주고 있나. 오만가지 생각이 휩쓸고 난 자리에 또다시 우울감이 무럭무럭 자라난다. 결론이 우울감으로 귀결되는 것조차 지긋지긋해! 결론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 놓고 우울해하기만 하잖아.


 내 다정한 애인은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소파 옆 바닥에 조용히 앉았다. 그러고는 내 손을 그러모아 두 손으로 쥐더니 이마에 입을 맞추며 이렇게 말했다.


 "무슨 생각이 드냐고? 음... 다음엔 출장 갔다가 꼭 빨리 퇴근해서 와야겠구나. 설거지를 빨리빨리 해 놔야지 너가 옥수수 전을 해 먹을 텐데. 그런... 자기반성?"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미안하고 고마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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