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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 Oct 26. 2022

아이 성을 바꿀 때 가장 힘들었던 점은...

지금은 별 거 아니지만 그때는 별 거였던.


 전남편과의 이혼 사유는 '가정폭력'이었지만, 제대로 된 재산분할이나 위자료를 따질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주는 대로 다급히 받아 나왔었다. 당시엔 무척 힘들고 지쳐, 심신의 안정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안전한 이혼에 성공했다는 것만으로 뿌듯한 마음도 잠시, 경제적 어려움에 오랫동안 허덕였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법정에서 다투게 되더라도 제대로 돈을 받아 나올 터인데...


 어쨌든 그런 이유로 법정 이혼 사유를 모아둔 자료들은 쓰이지 않고 보관되어 있었는데, 이혼 후 1년쯤 지난 후 꺼내게 될 일이 생겼다. 아이 성과 본을 내 쪽으로 바꾸고자 했기 때문이다.


 생전 처음으로 '성본 변경 신청서'를 적어보았다. 가정폭력으로 이혼했기에 이혼 직후 아이를 내 성으로 부르기 시작했으며, 어린이집에도 내 성으로 지내고 있었고, 주변인들도 모두 아이가 내 성과 같다고 알고 있었다. 키즈카페의 기록에도 내 성과 동일하게 남겨두었다. 아이의 물건에 적어 둔 이름을 사진으로 찍었고, 아이가 그린 자화상에 스스로 쓴 이름 석 자를 촬영해 증거로 함께 제출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전남편의 반대에 부딪혔다.


 기가 막혔다. 심지어 그는 내가 면접 교섭을 막고 있다고 판사에게 이르기까지 했다. 이혼 후 첫 번째 면접 교섭 날 전남편이 아이를 또 때리려 들었고, 화들짝 놀란 나는 아이를 데리고 곧장 도망친 적이 있었다. 정신과 치료를 받던지 뭘 하던지 하여튼 아이를 때리지 않는 정도의 상태가 되면 그때 면접 교섭을 진행하자는 내 문자에 그도 동의했었다. 그러고는 단 한 번도 연락이 없었던 그였다. 이제 와서 내가 면접 교섭을 방해한다니...? 대체 무슨 소리람.


 판사도 머리가 있고 생각을 할 줄 아는데 저런 거짓말에 속아 넘어갈까 싶었지만, 과연, 속아 넘어갔다. 그렇게 아들의 성본 변경 재판은 자연스럽게 면접 교섭 재판으로 바뀌었다. 서류가 오갈 때마다 인지대를 내가 결제해야 했다. 내가 원하는 건 아들의 성을 바꾸는 건데, 판사는 전남편을 위해 면접 교섭을 하라는 말만 했다. 한 번은 답답한 마음에 이렇게 질문한 적이 있다.


 "판사님, 그런데 이건 승오의 성본 변경 재판 아닌가요? 왜 계속 면접 교섭 얘기만 하나요?"


 그러자 판사는 이렇게 답했다.  


 "한 번에 하면 좋잖아요."


 "네? 인지대를 제가 내잖아요. 저는 돈이 없어요."


 "나중에 또 하려면 번거롭고 힘드니까 그냥 한 번에 합시다."


 "그게 무슨..."


 판사는 내 말을 더 들어주지 않았다. 전남편이 면접 교섭 신청을 하면 인지대를 그가 내야 하는데... 어쨌든 나는 가정폭력으로 힘들게 이혼했고, 면접 교섭 한 번 했을 때 또 때리려고 했다는 얘길 했다. 판사는 증거를 필요로 했고, 혹시 법정 이혼을 하게 되면 쓰려고 모아놨던 모든 자료를 싹 제출했다.


 그렇게 끝인 줄 알았다. 그러나 전남편은 끈질기게 반대했고, 판사는 가정폭력범의 말을 열심히도 들어주었다. 반대 이유는 '아이와 성이 달라지는 게 기분이 내키지 않아서'... 나는 갖은 사진들과 함께 A4용지 2장을 빽빽이 적은 신청서를 제출했는데, 전남편은 성의 없는 한마디 말로 나를 저지했다. 그저 기분이 내키지 않는다고. 그리고 그게 먹혔다. 이제 나는 내가 미친 건지 세상이 미친 건지 구분하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심지어 전남편은 가정폭력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애랑 잘 놀아주려다 한 두어 번 때렸던 건, 실수였고 지금은 반성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손찌검은 한두 차례였지만 욕 하고 고함지르고 협박 한 건?! 아이는 지금도 한밤중에 울면서 깬다. 네놈한테 맞는 꿈을 꾸면서. 나는 아이의 치료 기록과 전남편의 욕설이 담긴 녹음자료를 추가로 제출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판사는 전남편에게만 귀를 기울였다. 가슴이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


 재판은 1년이 넘도록 이어졌다. 판사는 아이와 아빠를 만나게 하라 했고, 나는 전남편이 사이코패스라는 내용의 탄원서를 제출했다. 내 말의 진위가 궁금했던지, 판사는 나와 전남편, 그리고 아이 각각이 심리상담 10회를 진행하라고 했다. 시간이 자꾸 흐르는 게 짜증 났지만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데리고 정해진 상담소로 갔다. 상담소장은 이렇게 말했다.


 "승오 아빠가 많이 반성하고 있던데, 한번 셋이 같이 만나보면 어떨까요?"


 "반성이요? 소장님 그 사람 딱 한번 만나봤다면서요? 뭘 보고 반성한다고 생각하세요?"


 "아, 승오 주려고 선물을 샀다고 하더라고요."


 "선물이요? 그게 단가요?"


 "네."


 내 손을 잡고 있는 자그마한 승오의 손이 아니었다면 난 미치고 팔짝 뛰다 못해 쓰러졌을 거다. 심리상담소 소장도 전남편 편을 못 들어 전전긍긍했다. 그는 전남편을 무척 안쓰럽게 여겼고, 나에게 용서를 강요했다. 원래 남자는 여자만큼 애를 잘 못 보잖아요, 실수로 애 좀 때릴 수도 있죠, 지금은 반성하고 있다잖아요, 다시 합치면 어때요? 엄마가 너무 예민하네, 남자가 너무 안쓰럽잖아요, 착한 사람 같은데... 끊임없이 속살거렸다.


 "소장님, 그 남자 집이 세 채에요. 돈이 넘쳐나는 양반이 고작 자그마한 장난감 하나 샀다고 반성한다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집이 세 채면 더 잘됐네요. 혼자 애 키우기 얼마나 힘들어요. 그냥 살림 다시 합치면 좋지 않겠어요?"


 "하..."


 대화에 도돌이표를 붙인 것처럼 돌고 돌았다. 재산이 탐났으면 애초에 이혼을 왜 했겠냐구요...


 사실 재판장 앞에서 아이와 전남편이 마주친 적 있었다. 아이는 나에게 안겨 있어서 미처 친부를 보지 못했지만, 그 남자는 분명히 아이를 보았다. 그런데도 궁금해하거나 반가워하는 기색 없이 오로지 판사에게 제 억울함을 토로하기에 급급했다. 아이 쪽은 몇 번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저 성의 없는 목소리로 '때린 건 반성하고 있다, 하지만 애 성은 안 바꾸면 안 되냐'라는 변명 같지 않은 변명을 이어갔다. 그 모습은 누가 봐도 아이를 애틋하게 생각하거나 그리워하는 아빠가 아니었다. 그저 나를 괴롭히고 싶어서 방해하는 모습이었다. 입으로는 반성한다 말했지만, 행동에서 진실이 드러난 것이다. 게다가 나는 결혼생활 내내 그의 거짓말을 지켜봐 왔다. 처음에는 나도 깜빡 속았지만, 이제는 안다. 그가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계속해서 전남편을 용서하고 살림을 합치라 종용하는 심리상담소 소장에게 신물이 나서, 이 내용을 탄원서로 적어 제출하고, 상담소 변경을 요청했다. 그러자 판사는 이번엔 근처 대형병원에 정신과로 가서 종합 심리검사를 받으라고 했다. 몇 달은 예약이 꽉 차 있는 곳인데, 신기하게도 곧장 검사받을 수 있었다.


 대형 병원의 담당의는 이미 전남편을 검사했다고 하면서, 면접 교섭은 당분간 안 하는 게 좋겠다고 슬쩍 일러주었다. 그게 무슨 뜻이냐 이것저것 캐물어도 환자의 프라이버시 때문에 자세한 건 말해줄 수 없다며, 어쨌든 아이를 위해서는 안 만나는 게 최선이라는 말만 했다. 나 보고는 아이를 혼자 키우는 엄마치고 스트레스 지수가 낮게 나온다며, 아이와 건강한 관계를 잘 유지하는 편이라고 했다. 안심하기가 무섭게 또다시 전남편과 재판장에서 마주했다.


 검사 결과지를 읽은 판사는 이렇게 말했다.


 "아빠가 많이 후회하고 반성하고 있는데, 엄마가 너무 예민하네요. 실수 한번 한 거 가지고 너무 몰아붙여요. 애를 때린 건 잘못했지만... 면접 교섭을 진행해도 되겠습니다."


 "거기에... 그렇게 적혀 있다고요?"


 분명 내가 들었던 것과 달랐다.


 "예. 어쨌든 그거는 그렇고 이제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결과는 우편으로 보내드리겠고요. 돌아가시면 됩니다."


 "그럴... 리가..."


 어영부영 끝이 났다.


 일 년 반이나 걸릴 줄 몰랐다. 아이 성을 바꾸는 재판에서 면접 교섭을 왜 안 하느냐를 주로 다룰지도 몰랐고, 판사가 그렇게 기를 쓰고 가정폭력범의 말을 들으려 애쓸지도 몰랐다. 인터넷에서 봤던 '판사 잘 만나야 한다'는 게 이런 말이었구나.


 우편으로 받아 본 재판 결과서에는 아이의 성과 본을 엄마 쪽으로 바꾸는 걸 허락한다고 쓰여 있었다. 짤막한 한 줄이었다. 이 한 줄 결과를 위해 긴 시간을 마음고생했구나 싶어 울음이 터져 나왔다. 차 시트에 앉아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울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바뀌었구나, 드디어, 바뀌었어...  


 이혼 후 아이의 성을 바꾸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1년 넘게 이어지는 재판도, 자꾸만 전남편의 편을 드는 판사도, 재판에서 질 것 같다는 걱정도 아니었다.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바로 '아빠가 애 좀 때릴 수도 있지.'라는 말이었다. 판사도, 가사조사관도, 모 심리센터 소장도 비슷한 말로 나를 괴롭혔다. 또한 거기에 동조해 '정말... 그런가? 남자는 원래 애를 좀 때릴 수도 있나? 내가 여자라 잘 모르는 걸까?'라고 흔들렸던 나 자신이다.


 요즘엔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가 흔하게 쓰이고 있지만, 몇 년 전 재판 당시만 해도 그들이 내게 가스라이팅을 하고 있단 걸 전혀 몰랐다. 그들은 계속해서 나더러 '예민하다'라고 했고, '남자는 그럴 수도 있다'고 했다. 이런 얘길 주변에 하지 않았기에 내 편을 들어줄 만한 사람도 없었다. 모두가 나에게 손가락질할 때, 정신을 똑바로 차리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그래서 남들이 보기엔 별것 아닐지 모를 그 재판 결과가, 나에게는 특별한 승리의 기억으로 강렬하게 남아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웬만큼 거친 태풍이 불어와도 잘 흔들리지 않는다. 힘든 결혼생활과, 이혼과, 성본 변경 재판과... 미처 다 적지 못한 수많은 고생들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힘든 시기를 버틸 수 있게 했던 건 하나의 믿음이었다. 모든 것이 지나간 어느 미래에 '별 것 아니었지!'라며 웃는 날이 오겠거니... 그러니 이 글의 마지막은 꼭 이렇게 마무리하고 싶다."


"다 지나고 나니 별 거 아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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