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어머니와 이별하는 중....

by 강나루

어머니의 얘기를 전해 들은 우리 식구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충격을 받았다.

딸은 이제 막 사춘기에 들어서 심상찮은 기운을 내뿜으며 생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방식으로 자신의 가슴 아픔을 온몸과 말로 표현했고, 예상치 못한 순간에 얻게 된 너무 큰 병으로 제대로 된 치료조차 해보지 못하고 어머니를 떠나보내게 돼버린 남편은 누군가에게 세게 복부라도 얻어맞은 듯 온몸을 구부린 채 입까지 벌리고 정신줄을 놓은듯했. 가장 걱정했었던 시아버지는 내 걱정이 무색할 만큼 진심으로 슬퍼서 그러시는 건지 아니면 살짝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해 그러시는 건지 슬쩍슬쩍 미소를 흘리며 어딘가에다 끊임없이 전화를 해대시며 정신없이 구셨다. 그 모든 것을 지켜보면서 크게 내색을 할 수 없었던 나 역시 폭탄이 터지는 순간에 잠깐이라도 노출이 됐던 것처럼 말소리도 멍하게, 눈앞도 뿌연듯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하지만 우리에겐 시간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결정을 내릴 사람도 우리 밖에 없었다.

시아버진 항상 그래 왔던 것처럼 그 당시에도 다른 여자가 있었다.(시댁 최강 빌런은 시아버지다)

그리고 미국으로 간 아주버니네는 영주권이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한국으로 나올 수 없다고 통보해 왔다.(관광 비자로 들어가 그곳에 우선 정착해 영주권을 신청해서 15년이 걸렸어요. 결국엔 엄마가 돌아가실 때도 불법체류자란 신분 때문에 나오지 았어요. 사실 방법이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닌데 왜 못 나오겠다고 했던 건지 알 수 없었습니다. 영주권 신청 시에 다들 콤보 카드를 신청해 영주권이 승인되기 전에 일도 하고 여행도 다니는데. 게다가 아주버님은 초밥가게도 열었었고 형님은 자신의 미용실도 open 했거든요. 그 사람들 속을 누가 알겠습니까...)

모든 것은 남편과 내 손에 달려있었다.

남편과 상의해 교회 안수 집사님이 계시는 학병원으로 어머니를 옮기고 3개월을 사시던 6개월을 사시던 치료에 전념하기로 결정을 했다.

시아버진 우리에게 선언하듯이 말씀하셨다

"니들 엄마 가고 나도 살아야 하니까 병원비랑 치료비는 너네가 내라. 그 대신 간병인 쓰는 비용은 내가 내줄게."


남편은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라했다.

자식이니까 당연히 어머니 병원비 보탤 생각이야 하고 있었지만 살 날이 얼마 안 남으신 어머니를 두고 평생을 아버님과 함께하신 어머니의 병원비까지 아끼려 하는 모습에 아버지를 두고두고 원망했다.

아내의 보호자는 남편이고 남편의 보호자는 아내란 걸 모르시는 것 같은 시아버지의 그릇된 모습은 훗날 내가 많이 아플 때 남편의 행동을 결정짓는 중요한 키 포인트가 돼버리고 말았다.

남편과 시아버지 간에 큰 싸움이 날 뻔하기도 했지만 그래 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 남편을 말렸다.

머니 가시는 길을 어지럽혀 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남편에게 말했다.

"여보, 어떻게 해도, 무슨 짓을 하더라도 후회는 남을 거야. 그런데 우리 6개월이 될지 3개월이 될지 모르지만 그 기간 동안은 잠시 휴전하고 엄마한테 집중하자. 그래야 엄마 맘 편히 모시지. 어머니 불쌍하고 안쓰러워서 어떡해?"

결혼한 지 14년 만에 처음으로 남편과 부둥켜안고 소리 내 울며 그 밤을 지새웠다.




남편은 완전히 사람이 달라진 듯 보였다.

우선 44년 동안 피우던 담배를 끊어 버렸다.

매일 어머니 병원에 들렀다 밤늦게 집에 돌아왔는데 환자는 우선 냄새에 예민해지고 담배 피우는 사람들 만이 가지는 특유의 인내(人내-비린내) 때문에 식욕을 잃는 것을 넘어서 구토를 유발한다는 것을 여러 번 얘기해 주고 엄마가 힘들어하시는 것을 보더니 여러 사람에게 기도를 부탁하곤 하루아침에 끊어 버렸다.(그 후 8개월 뒤에 다시 피우기 시작해서 지금껏 다시 금연을 못하네요. 제가 아무리 심하게 아프고 구토를 심하게 해도요)


그리고 어머니가 아프신 동안 술 약속, 골프 약속을 한 번도 잡지 않았다.

주중엔 퇴근 후에 들리고 주말엔 토, 일 이틀을 가서 내내 남편이 간호를 했다. 주말엔 간병하시는 분이 쉬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격일로 병원에 가서 어머니와 함께 있었다. 어머니와 간병인 언니가 먹을 반찬을 만들고 때론 죽이나, 국을 많이 끓여 갔다.

암에 먹는 약이 얼마나 독할지 짐작조차 할 수 없던 나는 최대한 당뇨와 고혈압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또 무리가 간들 이제 그게 무슨 소용인가 싶은 마음도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어 그 두 가지 때문에 평생 식단 관리를 해야 했던 어머니를 위해 좋다는 음식은 다 찾아다가 만들었다. 그리고 어머니 입에 맞을 만한 음식이다 싶으면 무엇이든 구해다가 한두 숟갈이라도 잡숫도록 하려고 최선을 다해서 음식에 마술을 부렸다. 마침 설이 끼어 있어 설음식을 다 만들어서 병원으로 가져가 함께 먹기도 했다.


난 그때 벌써 '베체트'라는 불치병까지 앓고 있었고 몇 주 뒤에 심장 시술을 앞두고 있다는 것을 어머니가 알고 있으셨기 때문에 병원에 들락 거리는 것을 불안해하시고 내가 나타나기만 하면 집으로 빨리 돌아가라고 안달을 하셨다.

어머니는 내가 당신의 병원에 음식을 만들어 나르고 말동무가 되어 드리고 우스개 소리를 하며 분위기를 up 시켜 드리는 것을 좋아하시면서도 내가 견디지 못하고 병세가 더 나빠질까 봐 항상 노심초사하셨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고단하고 힘이 들어도 오히려 어머니와 함께 있는 것이 마음 편했다.

남편이 잘못된 선택을 했을 때 아들에게 불호령을 내리고 내가 어떤 일을 하던 내가 받은 상처를 먼저 어루만져 주신 어머니에 대한 보답을 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다.

나에겐 희망도, 그 희망을 지킬 의지도 있었지만 내가 사랑하는 어머니겐 그럴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고 몇 번의 위험한 고비도 찾아왔다.


항상 눈물이 머리끝까지 차올라 누구든지 위로의 말이나 손길을 내밀기만 해도 자동 기계처럼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지던 시기였다.




정말로 아버님은 병원비와 치료비 일체를 한 푼도 보태주지 않으셨다.

그리고 엄마가 보험을 들어놓으셨는지 여부도 알려주지 않으셨다.

나중에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에 간병인의 비용인 620만 원 나왔는데 정말로 그 이상 한 푼도 더 사용하지 않으셨다.

병원으로 문병 오신 분들이 어머니에게 주고 가신 봉투도 다 시아버지께서 챙겨 가셨다.

병원에서 중간 진료비를 계산하라고 영수증이 발급되거나 다리가 불편하신 어머니가 앉으실 때 사용하기 위해 구입한 40만 원대의 의료기기용 보호대를 구입할 때도 일하고 있는 남편에게 수십 통의 전화를 하셔서는 결국에 잠시 외근을 핑계로 나온 남편이 헐레벌떡 뛰어와 결제를 하고 돌아가게 만드셨다.

미리 가지고 계신돈으로 결제하시면 어련히 계산해 돌려 드리련만 우리를 믿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선 원수를 사랑하라 말씀하셨지만 그때의 아버님의 모습은 내가 여태껏 봐왔던 어떤 어른의 모습과도 닮아 있지 않았다.


불현듯 그런 환경에서 자란 남편을 처음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가족이! 50년 가까이 함께 살을 맞대고 자식을 낳고 함께 키우고 동고동락한 남편이 날짜를 받아놓은 시한부 아내를 위해 조금의 양보도 배려도 심지어 치료비조차도 허락하지 않는 이기적인 모습에 없던 정도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남편도 피해자 중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그렇다고 같은 삶은 살면 그건 사람이 아니죠. 반성과 발전이 있어야 사람인 거죠.)


미국 아주버니네서도 오지 못하는 미안한 마음에 치료비를 보내오긴 했는데 6번에 걸쳐 백만 원씩 6백만 원을 보내왔다. (그때 아주버님은 스시바를 운영하고 있었고 형님은 미용사 자격증을 통과해 자신의 shop을 운영하고 있었어요.)

아닌 말로 그 아비에 그 자식이란 생각이 절로 들었다.

우리가 외동아들이었다면 당연히 해야 할 몫이었지만 미국에선 최소한의 도리를 한답시고 보내온 돈일 테고 남편이 했던 고생과 슬픔, 외로움에 비하자면 아무것도 아닌 위로였다.

오히려 우리 친정 가족들이 발 벗고 나서 이스방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 주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리고 딸이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다니기 시작했던 교회의 지인분들이 음으로 양으로 많은 도움을 주셔서 오랜 시간 견디는 데에도 무너지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어머니의 마지막을 걱정 없이 행복하게 보내드릴 수 있는 시간을 만들 수 있었다.


살면서 너무 많은 분들에게 잊을 수 없는 큰 은혜를 받아 마음 한편에 언젠가 누구에게든 내가 받은 이 은혜를 돌려 드려야겠다는 마음의 다짐을 굳게 하게 되었다.




날씨가 풀리고 3월쯤이 되면서 어머니의 병세는 눈에 띄게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어머니에게 어머니의 정확한 병이 무엇인지 알려 드릴 수가 없었다.

수술할 기회라도 있었다면 어머니에게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함께 투병 생활을 도와 드리려 노력했을 거다.

하지만 이미 너무 진행된 상태에 발견된 암이었기에 차마 어머니께서 3개월에서 길면 6개월밖에 못 산다는 말씀을 드릴 용기를 가진 사람은 우리 가족 중에 아무도 없었다.


병세가 나빠지고 약도 더 이상 효과가 없어지기 시작하자 병원에선 일시적인 퇴원을 권유했다.

이젠 끝이 보이는 것 같아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아버님은 주말만 되면 쉬셔야 한다면 산으로 들로 놀러 다녀오셔서 몇 달째 병원에만 갇혀 있는 엄마에게 어느 산에 무슨 꽃이 피었느니, 어딜 가니 어떤 게 좋더라면서 놀러 갔다 온 얘기를 전하시는 거였다. 시 아버지만 아니면 복도로 끌고 나가 눅진하게 두들겨 패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같이 다니는 미친년을 조리돌림이라도 하고 싶었다.

엄마가 10년, 20년 된 장기 입원 환자여서 병간호에 지치셨나?

아님, 어딜 다치셔서 오랜 기간 병원 신세를 지시고 재활을 거쳐서 다시 회복할 수 있는 환자였던가?

고작 3~6개월 시한부 환자인 아내를 두고 그 몇 달을 참지 못해 산으로, 들로.... 광견병 걸린 들개도 아니고. 아니 발정 난 똥개도 아닌데 그 정도 의리를 지킬 정신도, 양심도 없었던 걸까?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죽음이 코 앞에 다가왔는데도 어머니는 며느리 앞에서 민망함을 감추지 못했다.


망할 놈의 이 씨 족속!!!!

지긋지긋하고 치가 떨렸다.

시어머니가 입퇴원을 반복하셔야 한다는 얘기를 듣고 친정아버지께서 천만 원을 보태주셔서 가스차인'레조'를 타고 다니다가 우리 돈을 더해 준대형급 세단인 sm7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 차로 어머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여러 번 편하게 모실 수 있어 친정아버지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렸다.




절대 올 것 같지 않던 그날이 결국엔 다가왔다.

병원에선 인사를 드려야 할 가족이 있다면 연락을 해 마지막 인사를 하라는 얘기를 전해주었다.

어머님이 중환자실에 들어가시고 변한 할머니 모습에 충격을 받을까 싶어 면회를 자제시켰던 딸아이의 학교에 연락해 아이를 보내 주십사 부탁을 하고 친정엄마에게 택시를 태워 보내 달라 말씀을 드렸다.

딸은 그때 막 중학교를 진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고 어머니께선 딸의 교복 입은 모습을 한 번도 보신 적이 없으셨기에 꼭 한번 교복을 입고 인사드리게 하고 싶었다.


며칠 동안 제대로 음식을 드시지 못하시던 어머니는 혼수상태에 빠지셨고 기계를 통해 간신히 호흡을 유지하고 계셨다.

차가운 중환자실 안에서 임종을 얼마 앞두지 않으신 데다 열이 많이 나시니 옷을 제대로 입혀 놓지 않고 병원 시트로 살짝 덮어놓기만 했었는데 앙상한 팔다리가 너무 가슴 아프게 보여 당장이라도 어머니 몸에 매달려있는 기계들을 헤치고 안아 드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얼음장같이 찬 손 끝과 발끝은 금방 동상이라도 걸릴 것 같았다.

기관지 삽관한 것이 움직이지 않게 붙여놓은 테이프를 다시 떼었다 붙이는 바람에 오른쪽 입술은 지혈이 되지 않아 아무리 닦아내고 힘을 주고 누르고 있어도 피가 멎지 않았다.


언젠가 돌아가시는 분에게 가장 오래 남아 있는 감각은 '청각'이라는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생각났다.

딸을 기다리며 어머니를 잠시 보러 들어갔을 때 어머니에게 무슨 말이든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함께 들어가서 옆에 서계시던 시아버지가 엄마를 보시면서 우는 소리를 내시며 큰 소리로 말씀을 하시는 거였다.

"아이고~끝났네. 끝났어. 이제 가겠네. 아니, 갔어. 이제야 다 끝났네!!"

온몸에 소름이 쭉 끼쳤다.

눈물은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계셨다.

그 와중에도 난 크지 않은 목소리로

"아버님, 조용히 하세요. 여기 우리 말고 다른 환자들도 있어요. 그리고 엄마 들으시겠어요!"

"못 들어. 못 들어. 지금 안 들린다는데... 다 끝났구먼 뭐."

"엄마가 들으시던 못 들으시던 그런 말씀하시려거든 나가 계세요. 저도 듣기 거북해요."

큰소리를 내시며 눈물을 흘리는 시늉을 하시던 시아버진 겸연쩍어하시며 중환자실을 나가셨다.

그리고 난 차가운 어머니의 손을 양손으로 꼭 잡고 어머니의 오른쪽 귀에 대고 속삭이며 굳은 약속을 했다.

"엄마, 아범이 제일 걱정되실 거 알아요. 항상 제 편들어주신 것도 아범 걱정 때문이었다는 것도 알고요. 어떤 일이 있어도 지니 아범하고 헤어지지 않고 끝까지 같이 살게요. 제 생각 많이 해주시고 절 감싸주신 엄마 위해 끝까지 책임 질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감사했습니다. 사랑해요."


얘기를 마치고 엄마를 잠시 안아드리고 있을 때 교복을 입은 지니가 온통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중환자실 입구로 들어섰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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