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가지 마세요!

길면 6개월, 짧으면 3개월

by 강나루

'세균성 뇌수막염'에서 천만다행으로 후유증 없이 무사히 회복된 후에도 내 몸이 정상적인 컨디션으로 돌아오기까지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기존에 있던 병도 낫지 않은 데다 그 후로도 감기, 몸살 같은 가벼운 병이 지나가거나 남편과 작은 트러블이 생겨 조금만 스트레스를 받아도 2~3일씩 음식을 먹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일이 잦았다.


가까운 병원에서 링거를 맞고 식욕을 잃고 침실에 누워있을 때면 남편은 내게

"좀 괜찮아? 뭐라도 먹어야지?"

라고 물었고 식욕은커녕 물 마시는 것조차 힘들었던 나는 대부분 비슷한 대답을 했었다.

"나는 생각 없으니까 지니 밥 먹이고 당신도 밥 먹어"

그러면 남편은 하루고 이틀이고 삼일이고 물 한잔 챙겨주는 법 없이 내가 누워있는 창문에 암막 커튼을 내려주고 방문을 닫아 버리고는 아이를 데리고 신이 나서 끼니마다 내가 만들어 놓은 반찬과 국, 찌개로 진수성찬을 차려먹고는 했다.

내가 며칠을 아프던 다시는 뭘 먹겠냐고 묻지 않았다. 처음엔 미리 알아서 챙겨주길 바랐지만 시부모님의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아 보고 배운 적이 없었던 남편은 아픈 사람을 챙겨줘야 한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상대에 대한 배려나 사랑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걱정스러운 마음에 무엇이라도 챙겨 줄 것 같은데... 남편은 내 마음과 달랐나 보다.

아픈 몸으로 침대에 누워 끼니는 고사하고 한 움큼씩 되는 약을 삼킬 때마다 '이 약을 먹고 버티는 이유는 오직 지니를 지키기 위해서다.' '나를 놓지 않기 위해서다.'라는 말들을 주문처럼 중얼거려야 했다.

그래야 그날 하루를 견딜 용기가 생겨나곤 했다.


난 아무리 힘들고 엄청난 일이 생겨도 다 해결되고 편안하게 웃으며 얘기할 수 있게 되기 전에는 친정에 말을 옮기지 않았었다.

런 얘기들을 전해봐야 잘 해결되면 본전이고 조금이라도 깨끗하게 해결되지 않을 경우엔 어차피 모두 내 허물로 돌아올 거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기도 했거니와 괜한 일로 어른들께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외로움이 너무 크고 혼자 감당하기엔 벅찬 일들이 많았었다. 그래서 딸에게는 항상 '너는 혼자가 아냐. 네 옆엔 엄마가 있을 거야. 혼자 고민하고 애쓰지 마라'라고 얘기를 해주며 무엇이든 도움을 주려고 애썼고 앞으로도 언제든 힘든 일을 나눌 수 있는 부모가 되려고 마음먹었다.

어쨌든 항상 나는 며칠이 됐던 아무리 많이 아프던 꼬박 혼자 아픈 것을 견디는 쪽을 선택했기 때문에 언제나 몸이 아프면 마음도 같이 힘들어졌다.

아픈 것이 지나가고 남편에게 몇 번 얘기를 해봤지만 남편은 말 잘 듣는 막둥이 새끼처럼

"미안해. 담엔 내가 꼭 신경 쓰고 챙겨줄게"

라는 말뿐이었다. 여전히 그런다.


남편은 달라지지 않았다. 애초에 그럴 생각도 없어 보였고 트러블이 생길 때마다 남편이 하는 말은 그냥 외울 지경이 되었다.

"이제부터 조심할게. 앞으로 다신 이런 일 없을 거야. 앞으로 이런 일 또 생기면 당신 맘대로 해도 돼. 한 번만 더 기회 주라"


그러다 언제부터인가 지니가 내가 아프고 힘들어할 때 밥으로 흰 죽을 끓이고 보리차를 끓여 보온병에 담아 누워있는 엄마의 침대 협탁 옆에 갖다 놓기 시작했다.

아이가 혼자서 철이 들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마냥 좋아할 수만 없는 마음에 항상 슬펐고 지니에게 미안함을 가득 안고 살았었.

사춘기가 되고부터는 감춰져 있던 아이의 속마음이 드러난 것 같아 마냥 아이를 야단칠 수만도 없었다.

달라지지 않고 말로만 노력하겠다고 하는 아빠의 모습에 딸아이는 적잖이 실망한 듯 보였다. 누구보다 아빠를 따르고 사랑했 딸이었기 때문에 버릇없이 굴고 함부로 말하며 아빠를 존중하지 않는다고 아이만을 나무랄 수는 없었다. 아빠는 변하지 않는데 너는 그러면 안 된다는 말이 납득이 되고 설득력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자신이 보기에도 아빠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순간 만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으로만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며 술을 마시고 실망스럽고 부끄러운 행동을 하며 아이의 마음에 상처를 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빠 때문에 엄마가 아프다'는 생각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아이에 마음에 상처를 주고 싶지 않은 마음에 내가 아무리 아니라고 좋게 포장해서 얘기한들 이미 보이는 것을 믿게 됐고 어린 시절에 있었던 몇몇 사건들이 사진처럼 각인이 되어 아이의 확신은 믿음처럼 굳어만 갔다. 아이의 세상이 흔들리고 변해가는 중이었다. 아이는 자신이 살던 단단해 보이던 유리성을 스스로 깨고 자신이 봐야 할 것을 바로 바라보려고 애썼다.

다만 자신이 바라본 현실에 대처할 능력이나 방법을 아직은 깨우치지 못해 상처받고 피 흘리며 아파하고 있었다. 내가 가려줄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언젠가 한 번은 부딪혀야 할 현실이었다.


아빠를 함부로 대하고 심하다 싶은 행동을 꾸짖었을 때 늦은 밤이어도 강아지를 데리고 두세 시간씩 한강에 나가 들어오지 않고 친정 다른 가족들이 있을 때도 아슬아슬한 마음이 생길 정도로 문제가 드러나 보일 때쯤 어머니가 다치셨다는 시아버지의 전화 한 통을 받게 되었다.




어머니 '허벅지 뼈'가 골절되어 수술을 받으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놀란 마음을 추스를 새도 없이 병원으로 달려갔다. 어머님은 수술이 막 끝난 상태라 아직 면회를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아버님의 얘기를 전해 듣고 담당의를 만나게 됐다.

어머니는 동네에서 횡단보도를 건너시던 중에(아침 운동하러 가시던 중에) 갑자기 허벅지 뼈가 골절되어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119 구조대를 부를 수 있었고 응급수술까지 마칠 수 있었다고 아버님이 말씀하셨다.

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넘어 지지도 않고, 걷다가, 발목뼈나 무릎뼈가 아닌 허벅지 뼈가 골절이 됐다고?

어지간한 충격이 있지 않고서는 골절되지 않는 뼈가 걷고만 있었는데 부러졌다고?

내가 궁금해하던 것들은 담당의와의 짧은 면담으로 너무도 충격적이게 해결되었다.

어머니는 2년마다 나라에서 챙겨주는 '국가 건강 검진'을 빠짐없이 챙겨 받으셨고 기존에 '당뇨병'과 '고혈압'을 기저질환으로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병원에 다니시며 건강관리를 철저히 하시는 분이셨다.

그래서 의사의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우리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어머니의 병명은 '간암' 말기였다.

이미 암은 커질 대로 커져 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임파선을 타고 다른 장기 곳곳에 퍼져 손을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장기뿐만 아니라 뼛속 깊이 까지 암세포가 퍼져 길을 걷다가 대퇴부가 부러지는 큰 부상을 입게 됐던 거였다.


그리고 의사는 말했다.

편하게 드시고 싶은 거 드시고 통증 관리만 해드리며 보내드리면 3개월,

그래도 약이라도 써보고 치료하고 애를 써보고 싶다면 6개월을 예상할 수 있다고 말해 주었다.

시아버진 침통해하셨고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나는 구석으로 숨어 들어가 얼굴을 가리고 조그맣게 소리를 내며 울었다.


어머니의 남은 시간을 결정하는 권한이 우리에게 넘어오는 비통하고 애잔한 순간이었다.


어머니가 함께 하셔야 할 많은 순간을 놓치게 되는, 남편은 엄마를 잃는, 나는 내 편을 잃는, 지니는 친가에서 유일하게 사랑해 주는 사람을 잃게 되는 슬픈 발자국을 뗀 첫날이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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