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의 장례식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

by 강나루

친정 쪽에선 우리 딸이 첫 손주였던 까닭에 그 당시 누릴 수 있던 모든 사랑과 관심을 넘치도록 받으면서 자랐다. 하지만 시가 쪽에선 이미 형님이 딸만 둘을 낳은 데다 아들을 절실히 원하고 계셔서 우리가 낳은 딸은 그다지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나마 어머니 만이 온전하게 진심을 다해 지니 에게 사랑을 보여주시고 베풀어 주셨다.

어머니와 함께 있을 때 내가 유일하게 지니를 훈육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내가 지니를 기를 때 항상 친구 같은 엄마가 되길 원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를 막 대해도 된다는 건 아니었다. 생각하는 것보다 엄고 철저하게 가르쳤기 때문에 어느 때는 아이가 힘들어하는 순간도 있었다.

힘들다고 투정을 부릴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 친할머니와 있을 때였다. 어머닌 내가 조금이라도 화가 나서 딸아이 이름을 "지니야"라고 딱딱한 말투로 부르기만 해도 질색을 하셔서 시가에선 한 번도 딸을 제대로 훈육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어머니는 지니에게 안 되는 것이 없는 분 이셨다.

아이에게 모든 사람이 그렇다면 문제가 되지만 그런 사람이 한 사람쯤 있다는 것은 커다란 축복이다.

지니 스스로가 그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할머니가 많이 편찮으셨고, 곧 돌아가신다는 상황을 견디는 것을 무척 힘들어했다. 눈물이 얼굴에 범벅 되어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로 끅끅 대며 통곡하는 아이를 간신히 진정시킨 후 다른 식구들이 많이 오기 전에 할머니와 미리 작별 인사를 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주며 시간을 만들어 줬다.

그때가 지니가 이제 막 중학교에 진학하고 한 달이 조금 지난 4월 초였다.


중환자 실에는 여러 가지 모습의 환자들이 가진 얘기들이 많이 있는 곳이었다.

모두들 각자 가슴 절절한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을 희망이 없이 어머니의 임종을 기다리고 모여선 우리 가족들의 모습도 가슴 아프기 그지없었다.

길고 힘든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며칠 동안 집에도 제대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렇다고 먹는 것도 든든히 챙겨 먹지 못하는 나를 유심히 지켜보던 남편이

"지금껏 버티셨는데 오늘 안에 일이 생기진 않을 거야. 이러다 당신 먼저 쓰러지던지 줄초상 치르겠어. 어차피 장례식장도 집 가까운 쪽으로 옮길 거니까 우선 집에 가서 씻고 옷이라도 갈아입고 다시 오던지 기다리던지 그래."

"안돼. 그랬다가 임종을 못 지키면 어떡해. 여태껏 옆을 지키고 있었는데 잠깐 편하자고 자리 비웠다가 돌아가시면 천추의 한이 될 거야."

라고 완강하게 버텼더니 지켜보던 딸아이가 한 마디를 거들었다.

"엄마. 엄마 꼭 임종 지킬 수 있을 거고 설령 지키지 못한다 해도 할머니가 엄마 힘든 거 원하지 않으실 거야. 엄마 당장이라도 쓰러질 거 같아. 장례 치르려면 필요한 약도 챙겨야 되잖아.

서둘러 다녀와. 여긴 내가 아빠랑 지키고 있을게."

남편과 딸, 그리고 이모님들의 성화에 서둘러 집으로 가 옷을 갈아입고 며칠 동안 먹을 병원 약을 챙기러 가기로 하고 중환자 실을 나섰다.




집안에 환자가 한 사람 생겨 병구완을 하다 보면 병원비 명목으로 나가는 돈 외에 환자와 간호하는 사람의 식사비, 손님 접대비, 교통비, 부식비 등으로 예상하지 못했던 돈이 많이 나가게 된다.

그건 병원비에 포함시킬 수도 없이 생활비에서 소리도 없이 빠져나가는 돈이라 6개월 가까운 동안 수백만 원의 돈이 마이너스가 생겼었다.

샤워한 후에 시간이 조금 여유가 있다면 통장 정리라도 해서 이번 달 관리비 통장에 마이너스가 난 곳에 입금 처리라도 해야겠다는 생각도 하고 혹시나 어머니가 정말 이대로 돌아가시면 굽이 낮은 단화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터미널 지하상가를 지나며 무난한 검은색 단화를 한 켤레 사들고는 24시간 하는 편의점 같은 지하상가의 구멍가게 같은 작은 옆의 가게에서 아무 생각 없이 2천 원짜리 5줄의 만 원짜리 한 장의 로또를 샀다. 그 로또를 재킷 주머니에 쑤셔 넣고 돌아가던 길이었다.

집에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울먹이는 목소리로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 미안해. 가라고 하지 말걸.... 엄마 좀 전에 소천하셨어. 안수기도 받으시고 영접하시고 편하게 가셨어. 엄마 돌아가셨어. 흐흐흑흑...."


집으로 가란다고 나서지 말걸.... 어차피 힘든 건 마찬가지였는데... 어머니 마지막 가시는 먼 길.... 여기는 염려 마시고 맘 편히 가시라고 한 마디 더 보태 드릴 걸.

엄마 그동안 고생 많으셨다고 뒤도 돌아보지 말고 훨훨 날아 편한 대로 좋은 대로 가시라고 말씀 한 번 더 드릴 걸. 엄마. 사랑해요....




빈소는 계시던 병원이 아닌 조금 큰 병원으로 옮기고 례식을 치렀다.

아주버니 네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어도 미국에서 나올 수 없다는 말만 반복했고 남편 사촌 형제들은 많았지만 다들 바쁘다는 핑계 대기에 정신없을 뿐 막상 방명록과 부조금을 접수받아줄 사람도 없다고 할 지경이었다.

다행히 결혼하지 않은 사촌 형 한분이 접수는 받아 주시겠다고 말씀은 하시고 늦은 시간엔 계시지 못한단 말씀을 하셨는데 슬픔에 휘둘려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인 데다가 아프기까지 하고 남편은 문상객들이 주는 술을 한두 잔씩 받아 마시고는 취해서 정신을 못 차리고 아버님은 동네잔치라도 벌인 줄 아시는지 친구분들과 동호회 모임분들과 모여 앉으셔서 '왁자지껄' 웃고 떠들고 노시는 것처럼 보여 외갓집 어른들의 곱지 않은 눈총을 여러 번 받으셨다.

게다가 지니까지 자꾸 불러 대며

"지니야 여기에 술 좀 따라 드려라."

하시는 통에 안 그래도 뒤집힌 막내 이모의 속을 완전히 긁어 댔다.

"형부, 여기가 술집이에요?. 할머니 돌아가셔서 슬퍼서 힘들어 죽겠는 애를 무슨 술을 따르라고 난리야. 여기가 술집이냐고!!!

한바탕 싸움이 날 뻔하기도 했다.


부조금을 계산하는 문제도 그렇고 전체적인 장례식의 계산이나 전반적인 물품관리 등의 문제로 걱정하고 있을 때 친정동생이 3일 동안 회사에 휴가를 내고 아픈 나를 챙기고 장례식장과 모든 얘기를 하고 돈 문제를 해결하고 많은 고생을 했었다.


남편이 개인사업을 시작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회사의 전국 지점에서 많은 손님들이 와 주셨고 교회에서 장례예배를 주관해 주시고 음으로 양으로 큰 도움을 주셔서 어머니를 보내드리는데 쓸쓸하지 않으시게 우리도 경험이 없어 힘들었지만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잘 모셔 드릴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모든 일이 다 끝난 후에 일어났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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