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하니 변하긴 했다. 남편이? 아니 내가
아주버니네가 이민을 가면서 시부모님은 막내 이모네와 함께 사셨던 예전 건물로 다시 이사를 오셨다.
저간의 사정을 모두 알고 있었던 이모님은 안 그래도 이뻐해 주시던 나를 안타깝고 미안하게 여기시며 더욱 살뜰히 챙겨 주셨다.
남편의 술 문제로 골치를 썩이며 어머님과 이모님에게 도움을 요청했었던 나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남편을 여러 차례 꾸짖고 야단치시며 그의 술버릇을 고치길 바라고 도와주시기도 하셨다.
그 말을 듣는다고 고쳐질 남편이 아니었지만 형이 이민을 간 이후에는 처음엔 그래도 듣는 시늉이라도 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몇 달이 지난 후 시아버지 생신이 있는 주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주버니네가 이민을 간 이후부턴 맛있는 식당을 찾아 예약한 후 식사는 밖에서, 집에선 케이크의 촛불 끄기와 간단한 다과를 나누는 것으로 생신을 조용히 지낼 수 있었다.
그런데 그해 생신 만은 유독이 집에서 상을 차리기를 원하셨다.
전적으로 다 남편의 탓 만은 아니었겠지만(전 제 병에 기름을 붓고 라이터로 불을 붙인 후 더 잘 타라고 응원해 마지않는 남편이었다고 결단코 생각합니다.) 어쨌든 남편과의 문제로 생긴 병이 채 낫지도 않은 상황에서 집에서 생신상을 차리라고 시아버님께서 말씀하시는 건 내게 전면전을 선포하시는 것과 마찬 가지의 기분이 들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겉으로 부러지거나 터지거나 하는 상처가 보이는 병도 아니었으니 시간이 얼마쯤 흐른 후부턴 내가 꾀병을 부린다고 생각하시고 계시는 듯했다.(실제로 그렇게 생각하신다고 친정아버지한테 말씀하셔서 친정아버지가 대로하신 적이 있었어요.)
그냥 간단히 밥과 국에 불고기 좀 무치고, 잡채 조금 하고, 샐러드 조금 만들고, 전 몇 가지 부치고, 생선 몇 마리 굽고 식구들끼리 조촐하게 지내자고 말씀하시는 거였다.(생일 때는 항상 막내 시이모님 댁 식구들 다섯 명과 우리 식구들 다섯 명까지 합이 열명이 되는 사람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살림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한식 생일 상차림에 '조금'과 '몇 가지 만'은 통상적으로 쓰이는 뜻과 다른 거 아시죠?^^)
그 무렵 심해진 목 디스크와 척추관 협착증으로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아프고 힘들어 진통제와 신경안정제, 파스를 달고 살아야 했고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인지하기 시작한 두통의 고통이 삶의 질을 현저하게 떨어뜨려 놓을 때였다.
게다가 나는 몸이 아픈데도 불구하고 계속 맞벌이를 하고 있었다.
남편의 장점 중 하나인 가정경제의 안정적 유지를 위한 노력이 빛을 발해 외벌이 만으로도 살림을 하고 아이를 키우는데 크게 부족함은 없었지만 IMF 때의 충격의 산물이랄까? 아니면 몸이 바쁘면 머리가 단순해지는 점을 노렸던 걸까? 아무튼 맞벌이를 놓을 수는 없었다.
맞벌이를 하며 육아와 살림을 똑같이 잘 해내야 한다는 강박증과도 같은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잠시도 내 시간을 가질 수는 없었다.
님편이 나를 조금만 도와주고 품어줬더라면 남편을 미워하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빨리 버릴 수 있지 않았을까?
생신상을 차리기로 한 주의 월요일이 됐을 때 이모님이 연락을 하셔서는 '네가 얼마나 힘든 줄 너무 잘 알고 있으니 이번엔 내가 형부의 생신상을 차려 드리려고 한다. 그러니 넌 그날 식사시간에 맞춰 와서 밥만 먹고 가면 된다'라고 말씀해 주시는 거였다.
너무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에 생신상을 차릴 비용 외에 이모님께 드릴 용돈 조금과 감사 편지를 적어 준비를 해 두었다.
그리고 남편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자기야, 이번에 막내 이모가 나 대신 아버님 생신상 준비해 주신대. 아무리 식사시간 맞춰오라고 했다고 그때 갈 수는 없으니까 금요일 저녁은 아무 약속하지 말고 일찍 들어와.
부탁할게. 당신 아버지 생신이야! 이번에 또 내 얘기 안 듣고 술 먹고 오든지 사고 치면 나 무슨 짓 할지 몰라. 알았지? 약속했다!!!"
"알았어. 걱정 마. 엄마도 전화하셨어. 이번엔 내가 꼭 약속 지킬게.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유혹이 있어도 내가 이번 주 금요일엔 퇴근하자마자 집에 올게. 이번에도 약속 어기면 당신이 하라는 대로 다할게. 나 믿어봐. 진짜!"
라며 철썩 같이 약속했다.
반신반의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나는 한번 더 남편을 믿어 보기로 했다.
그럴 줄 알았으면서!....
그럴 거라 생각했었어도 크든 작든 내 믿음에 대한 대답이 거짓이거나 배신이면 그것은 가슴 아프고 뼈가 시리다.
남편은 금요일 저녁에 '여보, 미안해. 조금 늦을 거 같아. 그래도 11시 전에는 들어갈게'라는 문자 하나 만을 달랑 남긴 채 다음 날 새벽이 되도록 연락이 되지 않았다.
화가 나지는 않았다.
그저 실망감에 마음이 착잡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덩달아 밤을 새운 나는 터질 것 같은 머리로 생각을 해야 했다. 언제 들어올진 모르지만 아예 시가에 가지 않고 다 뒤집어 버릴지 아니면 시간 안에 들어온다면 내가 생각한 대로 행동해야 할지를.
마음을 못 정하고 있을 때 비밀번호를 누르고 남편이 들어왔다.
자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내가 집안의 불을 모두 환하게 켜놓고 거실 한가운데 소파에 떡하니 버티고 앉아 눈에서 서슬 퍼런 인광(燐光)을 내뿜고 있는 것을 보더니 남편은 그 자리에서 '헉'하는 소리를 내고는 놀라서 펄쩍 뛰었다. (30cm쯤 뛰었어요. 거짓말 조금 보태서.)
시간을 보니 9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소리를 지를 것인지,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대며 기선 제압을 할 것인지, 아무 말도 없이 방으로 들어가 누워버리고 오늘 하루 종일 꼼짝도 안 할 것인지.'
짧은 시간 안에 마음을 결정한 나는 그제야 남편을 제대로 쳐다보았다.
그런데!! 돌아온 남편의 왼쪽 다리 무릎 아래까지가 하얗게 통 깁스가 돼있었고 천천히 목발을 딛고 집안으로 들어서는 거였다!!!
나는 너무 놀라 남편이 늦게 온 것도 모자라 아예 아침 일찍 귀가했다는 사실도 잊은 채 현관으로 뛰어나가 남편을 부축하고 집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도우며 물었다.
"자기야, 어떻게 된 거야? 어쩌다 다친 거야? 설마 교통사고 난 건 아니지? 부러졌어? 깁스 오래 하고 있어야 된대? 세상에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자기야, 나 붙잡고 조심해서 올라와"
이렇게 여러 가지 질문들을 쏟아냈다.
그런데 남편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나를 또 한 번 깊은 절망과 빡침의 세계로 인도했다.
"어제 거래처 병원 원장하고 사무장 하고 술 마시고 장소 옮기다가 보도블록 하고 차도 사이를 잘못 밟고 넘어졌는데 인대가 늘어났대. 3주 정도 깁스하고 있어야 될 것 같다고....."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전 콧방귀를 꿨어요.
저 인간이 날 또 졸로 보는구나.
27년째 살고 있는 지금은 너무 잘 알고 있어 어지간해선 시도하지 않지만....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다 남편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다 해도 남편이 속일 수 없는 단 한 사람이 있다면 그게 바로 (저)입니다.
남편 눈동자의 미묘한 흔들림, 입가 근육의 경직된 떨림, 목소리의 변화, 피부색의. 변화... 그리고 냄새부터 달라져요.
긴장하면 사람들 냄새가 달라지거든요.
그리고 전 냄새랑 맛에 유난히 예민합니다.
추측해 보건대 조금 다쳤던지, 안 다쳤던지.
약속은 지키지 못했고 생각보다 많이 늦었고 조금 다쳤으니? 과장되게 치료를 하고 온 거였어요.
인대가 늘어난 건 웬만해선 통깁스를 해주지 않아요.
인대가 파열됐다면 모를까.
차라니 반깁스를 하고 왔다면 제가 믿었을 거예요.
저도 발목을 잘 다쳐 정형외과 단골이었거든요.
난 조용히 얘기했다.
"지금 시간이 별로 없고 지니 깰 시간에 다투기도 싫으니까 빨리 얘기하고 본가에 가자.
당신이 하는 짓 보면 생신이고 뭐고 본가에 안 가고 다 훌렁 뒤집어 버리고 싶지만 이모가 고생해서 상 차리 신 거 망치기 싫으니까 얼른 옷 갈아입고 준비해. 요즘도 그렇게 과잉 진료해 주는 병원이 있어?
병원으로 4차를 갔던지, 병원에서 해장을 했구먼! 잘 생각하고 있어. 내가 무슨 짓까지 할지는 나도 아직 결정 못했어."
머쓱해진 표정을 하고 있던 남편은 서둘러 준비를 마쳤고 우리는 다행히 예정 시간보다 이르게 도착할 수 있었다.
깁스를 하고 나타난 남편 때문에 음식 준비로 부산하던 이모네 집은 순식간에 어수선 해졌다.
다친 이유가 술 때문이고 보기와는 다르게 심하게 다친 게 아니라고 남편이 직접 말씀드렸지만 '작작 좀 퍼 마시고 다녀라' 며 등짝을 후려치는 이모와 못마땅한 표정을 감추시지 않는 시아버지와는 달리 시어머니는 안타까워하며 우리가 시가에 있는 내내 어쩔 줄을 몰라하셨다.
어머님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일주일에 여러 가지 이유를 대고 술을 마시는 것이 4~6 일이고 마시기만 하면 새벽 3~4시 귀가는 기본이고 동네 창피한 술버릇에 사우나에서 씻고 온다는 핑계로 1~2일은 외박이니 난 이제 더 이상 봐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아무리 이모가 상을 차려 주신다고 하셨어도 온갖 잘못을 저질러 놓은 자식은 어머니 옆에 붙어 앉아 꼼작도 하지 못하게 하고 정작 몸이 아픈 나는 따로 음식도 준비해 오고 돈도 따로 준비해 드리고 목부터 온 팔에 파스를 붙이고 진통제와 신경 안정제를 때려먹고 생신상을 차리고 있자니 슬슬 부아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입을 다물어 버렸다.
밥을 어떻게 먹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얼른 상을 치우고 케이크와 다과까지 먹은 후 집에 가겠다 모두 일어났을 때 어머니가 내게 슬쩍 오셔서는 봉투를 쥐어 주셨다.
"ㅇㅇ아.ㅂ ㅂ가 얼마나 아프고 힘들겠니! 너 힘든 건 말할 것도 없겠지만.... 이걸로 사골 사다가 고아서 ㅂ ㅂ이 좀 먹여라. 그래야 다리 빨리 낫지... 너랑 지니도 같이 먹고. 힘들어도 꼭 끓여 먹여라."
라고 당부에 당부를 더 하셨다.
내가 그렇게 아파도 한 번도 등장하지 않던 시가의 하얀 봉투가 내 손에 쥐어졌다.
"어머니가 안 주셔도 해 먹이려고 했는데... 제가 정성껏 끓여서 한 솥 가득 꼭 먹일게요. 걱정 마세요.
나는 속상한 마음을 감추고 한껏 예쁘게 대답하며 이모 댁을 나섰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남편에게 일주일치의 여행가방을 챙기라고 얘기했다.
"여보 왜??? 내가 잘못했어. 정말 잘못한 거 알겠어. 나 나가라고 하는 거지? 내가 갈 데가 어딨어. 당신이 잘 참아 주니까 내가 도가 지나쳤나 봐. 미안해. 여보."
"자꾸 미안하다, 잘못했다는 소리 하지 마.
그건 진심이 있을 때나 하는 말이고, 통하는 말이야. 당신 말에 진심이 0.1% 라도 있다고 생각해? 그랬음 이렇게 까지 안 됐겠지.
어딜 가있든 난 모르겠고!
잔소리하는 와이프 없이 편하게 얼마나 좋아? 우선 1주일 나가 있어 보고 좋으면 2주도 좋고, 3주도 좋고. 당신이 더 나가 있고 싶음 얼마든지 그래도 돼. 무슨 생각을 해도 좋고 아무 생각 없이 살아도 좋고 그것도 당신 편한 대로 하고.
이제 구속하고 잔소리 안 할게. 해봐야 소용없고 나만 힘들고 바보 돼.
내가 이러고 살 필요가 없어.
당신은 결혼하지 말고 혼자 자유롭게 살았어야 되는 사람인데.
당신 혼자 지낼 시간을 공식적으로 얼마든지 여유롭게 줄 테니까 편하게 쉬고 지내.
그동안 나도 복잡한 머리 좀 식히고 생각 정리할 테니까. 옷 더 필요하면 언제든지 들려도 되니까 전화해 알겠지? 아! 그리고 그 깁스 당장 떼 버려라.
무슨 자해 공갈단도 아니고 어른들만 놀라게 해 드렸잖아. 보기 싫네. 어서 가서 후딱 떼 버려."
남편은 그 길로 집에서 쫓겨... 아니, 집 근처로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난 시어머니께서 주신 하얀 봉투를 들고 오랜만에 백화점 나들이에 나섰다.
지치고 찌들고 애쓴 내 마음을 위한 위로의 선물을 사주고 싶었다.
그리고 남편을 위한 사골국은 짙은 푸른색의 무릎까지 오는 잔무늬 꽃 원피스가 되어 그 해 여름을 밝혀 주었다.
남편을 강제로 여행 보낸 것은 큰 효과가 있었다.
어떤 때는 백 마디의 말보다 한 번의 행동이 큰 효과를 볼 때가 있다.
남편은 4일 만에 길게 작성한 편지를 가지고 집으로 들어왔다. 남편에게 혼자 생각할 시간을 준 것이 큰 역할을 한 것이었다.
그동안은 아무리 싸우고 잔소리를 하고 화를 내도 내가 어쨌든 받아 준다는 사실에 익숙해져 있었던 남편은 내가 자신과 헤어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의 0.1%만 보여 줬을 뿐인데도 정신을 확 차리는 계기가 되었다고 얘기했다.
그리고 실제로 변하기 시작했다.
술도 줄이고 귀가 시간을 앞 당기고 외박은 미리 얘기되지 않은 일 외에는 일어나는 일이 생기지 않았다.
볼썽사나운 술버릇도 당연히 없어져 버렸다.
이렇게 쉽게 해결될 일을 그동안 그렇게 애를 썼던 건가 허탈한 마음이 들 정도로 모든 일 들이 순조롭게만 풀려 가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은 그랬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