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큰 늙은 남의 아들의 엄마 노릇은 사양하겠어!!
내 나이 50이 넘도록 많이 경험해 보지는 못한 일이었던 것 같다.
내가 양보하고 배려하고 기다려주면 그 마음을 알아채고 자신의 성급함이나 고집, 아집 등을 내려놓고, 그때까지의 내 노력에 감사를 표하는 사람, 자신은 더 많은 배려와 양보, 기다림을 베풀어 주는 사람의 존재를 말이다.(나는 이런 사람이 내 남편이길 원했다.)
양보와 배려 기다림 등은 특히 부부간에 필요한 덕목이라 생각한다.
서로 다른 남, 녀가 25~30년간의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다른 환경과 가치관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에 서로에게 조금씩 배려하고 양보하고 기다려 주며 또, 포기해야 할 건 빠른 시간 안에 깔끔하게 포기해야 비로소 하나의 가정을 이루며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참아야 유지되는 관계는 폭력이다'
누군가는 얘기했다.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어느 날 남편 팀의 회식이 있던 날이었다.
웬일로 12시를 넘기지 않은 시간에 전화가 왔다.
"여보, 오늘 회식 일찍 끝났어. 잘했지!ㅎㅎㅎ. 그런데 나 차를 어디에 뒀는지 죽어도 못 찾겠어. 술을 좀 많이 마셨거든. ㅎㅎ. 직원이 데려다준다는데 당신이 대리비 좀 가지고 내려와라. 내가 현금이 하나도 없네. 알겠지? 나 지금 집에 간다~."
이렇게 말하고는 전화를 '툭' 끊어 버리는 거였다.
기가 찾지만 하루 이틀 있었던 일도 아니고 당시 남편이 약속을 지킬 거라고 생각도 하지 않았기에 그냥 그러려니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20분쯤 지났으려나? 남편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안녕하세요? 저 이 팀장님 부하직원 ㅁㅁ인
데요.... 지금 집 근처 전철역에 도착했는데 팀장님이 차에서 내리셔서 신발 벗고 바닥에 주저앉으시고는 저는 자꾸 그냥 가라고 하시는데 도저히 그냥 두고 갈 수가 없어서 전화드렸어요...."
순식간에 내 몸은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화끈! 하면서 온몸이 수치심으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정말 죄송해요. 제가 지금 바로 나갈 테니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죄송합니다."
서둘러 옷을 챙겨 입으면서 생각했다.
그 정도로 취했다면 나보다 훨씬 키가 크고 덩치가 있는 남편을 혼자 데리고 들어 올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엔 자고 있던 제부에게 SOS를 보내야만 했다.(아! 무너지는 내 자존심!!)
제부와 함께 급하게 전철역으로 달려가 보니 정말 가관이 아니었다.
남편을 태우고 온 여직원은 이제 갓 입사한 신입 여직원이었다. 진상을 떨고 있는 상사를 보며 속으로 어떤 생각을 했을지... 나를 얼마나 불쌍하게 생각했을지...(악악^악악악!!!)
남편은 신발을 벗어 놓고 양복 윗도리까지 벗어 신발 위에 곱게 개어 놓은 뒤 양다리를 쭉 뻗은 채 땅바닥에 퍼질러 앉아 함께 온 여직원에게 '어서 가라고, 가도 괜찮다고, 여기가 내 집이라고.' 큰 소리로 웃으며 얘기를 하고 있었다.
다행히 오고 가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지만 가끔씩 오가는 사람들이 지나가며 술주정을 해대는 이스방을 쳐다보는 눈빛은 '경멸' 그 자체였다.
우리 동네는 예의가 바르고 깍듯하고 오래 사신 분들이 많아 한집 건너 한집 모르는 집이 없어 이런 일이 생긴다고 모여들어 구경을 한다거나 하는 경우는 없지만 내일 이면 우리 아파트는 물론이고 교회와 다른 아파트에도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퍼질 것이 뻔했다.
남편이 정말 밉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우선 함께 온 여직원에게 정말 고맙고 미안하다는 얘기를 수도 없이 하며 받지 않겠다는 대리비를 억지로 쥐어주고는 못내 안쓰러운 눈빛을 내게 보내는 여직원을 먼저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는 남편의 등짝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야!!! 이 ㅂㅂ!! 일어나. 정신 차려! 빨리 안 일어나? 경찰에 신고하기 전에 빨리 일어나.
정신 차리라고!! 내가 적당히 하라고 했지. 길바닥에서 이게 무슨 개망신이야?
내가 네 엄마냐? 내가 말 더럽게 안 들어 처먹는 사춘기 아들 키우니?
내가 한걸음, 두 걸음 양보하면 너도 생각 좀 하고 두 걸음, 세 걸음 물러서 양보는 못할 망정 어떻게 열 걸음, 스무 걸음을 앞으로 처 밀고만 나오냐? 동네 망신도 유분수지!!!
내가 40년도 넘게 산 동네에서 얼굴도 못 들고 살게 하려고 작정했어?
정신 차리라고! 미친 거지? 그런 거지? 지니 보기 부끄럽지도 않아?
당신이 지니 아빠인 거 이 동네 사람들 다 알아. 그리고 웃지 마. 지금 웃음이 나와?
생각 좀 하고 살아!!"
그때까지 장난치듯 웃으며 헤롱 대던 남편은 비틀 거리며 벌떡 일어나 신발을 찾아 신고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바지에 묻은 흙도 툭툭 털어냈다.
그리곤 술에 잔뜩 취한 목소리로 담배 냄새를 풀풀 풍기며 혀가 잔뜩 꼬인 말투로 내게 말하기 시작했다.
"여보, 미안해. 정말 미안해.
오늘은 조금만 마시고 일찍 들어오려고 했는데..."
나는 제부에게 들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조용히 읊조렸다.
"입 닥쳐라.... 술 냄새난다."
비틀거리는 남편의 한쪽 팔을 붙잡으며 난 숨이 막혀왔다.
고장 난 심장이 마치 전속력으로 달리는 기차처럼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내가 얼마만큼, 언제까지 참아줘야 하는지 가늠할 수가 없다는 게 나를 더 힘들게 했다.
나는 남편을 원했던 거였지 나이만 먹고 철은 덜 든 늙은 아들을 원했던 게 아닌데....
나는 남편의 엄마 노릇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남편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하고 싶은 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자식을 제대로 키우지 못하신 시부모가 많이 원망스러웠다.
마음에 또 하나의 깊은 상처를 남기고 힘든 하루가 지나갔다.
이쯤에서 남편이 적당한 선을 지키고 멈췄다면 얼마나 다행이었을까!
몇 달 후 시아버지의 생신이 있던 주말, 남편은 내가 가진 마지막 수를 두게 만들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