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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나루 Feb 21. 2022

세상이 빙빙 돌았다. 숨이 막혔다.

공황 장애


체력이 너무 많이 떨어졌다 생각했다.

CRPS 확진 이후에

따뜻해지기만 하면 콩이와 잠깐의 산책이라도 꾸준히! 매일! 반드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으로 불안한 마음을 다독여 보기로 했다.




CRPS로  확진받은 다리는 재활 없이는 걸을 수 없다 말했었다. 하지만 방송을 통해 콩이와 산책하는 기쁨을 다시 알게 된 나는 이를 악물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https://youtu.be/hRXnhpXKjlA


돌발통이 생기면 마약 진통제를 한 움큼씩 삼켰다. 흔들리는 몸과 온전히 힘을 주기 어려운 다리를 위해 지팡이를 짚고 비틀거리며 한발, 한발 걷는 연습을 시작했다.

휠체어를 끌고 뒤를 따라오는 딸은 내가 언제 기절할지 몰라 초긴장인 상태로 비틀거리는 내 바짝 붙어 천천히 함께 운동해? 주었다.

먼 거리는 어렵더라도 차에서 내려 건물 안에 있는 병원까지 찾아갈 수 있을 정도는 되어가고 있을 무렵 코로나가 심해져 외출이 어렵게 되고 말았다.

그래도 집안에선 무리 없이 걸어 다닐 수 있을 정도는 되도록 열심히 걷는 연습을 했다. 비록 기저질환이 너무 많아 병원에서 여러 차례 당부를 거듭하는 탓에 외출은 삼가어도 마음만 먹으면, 지팡이와 함께라면 어디라도 갈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날은 날이 조금 흐렸었다.

사고가 있고 항상 전년의 연말부터 신년의 2월 말까지는 아픈 몸이 더욱 심해지고 우울증과 기억상실증이 극에 달하는 시간을 겪게 됐다. 올해는 그 어느 때보다 명료하고 맑은 정신으로 지나간 일들을 복기하며 참혹한 3개월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흐린 날씨에 몸이 이곳저곳 아프다고 말할 만큼 불편한 하루를 보냈고 수면제를 먹었는데도 잠이 들지 않아 에 취한 채 TV를 틀어놓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러다 문득 배가 고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사를 하고 짐 정리가 끝난 후 식욕이 떨어져 하루에 한 끼 정도만 먹고 지낸 지가 넉 달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그런데 새벽 늦도록 잠들지 못하는 날은 수면제에 취해 가끔 음식을 챙겨 먹는 날이 있었는데(수면제 부작용) 날이 그런 날 중 하나였다.

하루하루 초인적인 스케줄에 정신없어 매일 12시만 되면 잠자리로 직행하던 딸도 마침 깨어 있었다. 견딜 수 없이 배가 고프다고 느껴졌을 때 내가 중얼거리듯 말을 꺼냈다.


"엄마 배고파. 그런데 집에 있는 건 먹고 싶은 게 없어. 지금 시간엔 배달되는데도 없을 거고... 엄마 요기 앞에 편의점 갔다 올게."

"뭐라고 하시는 거야. 김여사. 지금이 몇 신데... 그리고 어디를 혼자 갔다 온다는 거야. 아직도 조금만 힘들면 기절하면서. 게다가 지금 약 먹고 취해 있잖아. 절대 안 돼. 뭐가 드시고 싶은데? 내가 나가서 사 올게. 그게 빠르지. 5분도 안 걸려."

"싫어. 엄마 혼자 갈 거야. 너 너무 피곤해 보여. 그리고 시간도 늦었어. 빨리 자기나 해. 엄마 혼자 천천히 조심해서 갔다 오면 되지. 나 혼자 갈 거야."


종일 우울한 기분에 아픈 몸까지 겹쳐 울고 웃고를 반복했던 나는 수면제를 먹고는 긴장이 풀어져 평소에 어느 누구에게도 맘 편히 부려보지 못한 어리광과 생떼를 내 어린 딸에게 부리고 있었다.

옥신 간식 몇 마디의 말을 더 주고받다가 결국 함께 편의점에 갔다 오기로 하고 실내 복위에 두툼한 롱 패딩을 꺼내 입고 털부츠까지 꺼내 신고는 지팡이 대신 딸의 팔짱을 껴고 밤마실을 나섰을 때였다. 집을 나설 때만 해도 비록 5분도 채 안 걸리는 집 앞의 편의점이었어도 오랜만의 딸과 둘이 집을 나서다는 것이 즐겁기만 했었다.


그런데 현관문을 나서서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부정맥의 엇박자가 '두`'두근'하고 가슴에서 느껴다. 그리곤 리베이터의 불빛이 유난히 눈이 부시다는 생각이 드는 것과 동시에 엘리베이터 전체가 나를 중심으로 뱅글뱅글 돌아가는듯한 심한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갑자기 멀미라도 하는 듯이 얼굴이 달아오르고 열이 오르며 이마와 등 쪽으로 땀이 흐르 구역과 구토가 몰려왔다.

순식간에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14층에서 주차장까지 내려오는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갑자기 말이 없어진 나를 보고 딸이 놀라며 말을 걸었다.


"엄마. 왜 그래? 괜찮아? 엄마 얼굴이 이상해. 엄마 기절할 거 같아. 집에 가자. 엄마."


딸이 그렇게 말하는데도 난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엄마가 이사하고 요즘 힘들어서 체력이 떨어져서 그런 걸 거야. 별거 아냐. 천천히 걸어서 갔다 오자. 갈 수 있어."


말을 마치는 데까지 얼마나 숨을 헐떡이며 단 한 모금의 공기라도 더 빨아 드리기 위해 노력했는지.... 온몸의 구멍이란 구멍은, 하다못해 모공까지 최대한 열려 공기 중의 산소를 미친 듯이 빨아드리려 노력해야 할 것 같았다.

어항 속에서 꺼내어져 아스팔트 바닥에 패대기 쳐진 금붕어 같았다. 너무 숨을 들이켜려 애쓰자 헛배가 금세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다.

한발 한 발을 내디딜 때마다 다리에서 힘이 빠지고 손과 다리가 덜덜 떨리고 숨이 막혀 오기 시작했다. 숨이 막혀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 온 몸을 떨며 거의 딸의 팔에 매달리다시피 하여 바닥에 주저앉을 지경이 되었을 때 편의점 바깥 의자에 잠시 앉아 기다릴 수 있게 됐다.

바깥 의자에 앉아 온몸을 덜덜 떨면서 멍한 정신을 붙잡으며 기절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허리를 펴면 더 숨이 짧아질 거 같은 생각에 죄 대한 앞으로 몸을 숙이고 앉아 있자니 '어쩌다 이렇게 까지 체력이 떨어졌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한심하고 속상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던 길은 제대로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어떻게 걸었고 어떻게 돌아왔는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리고  5분이면 다녀올 수 있는 편의점을 30분이 다 되는 시간이 걸려서야 돌아올 수 있었다.

다만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렇게 힘든 일을 겪었다는 것이 있었던 일인 싶을 만큼 아무 일 없듯이 무심히 지나고 또 잠시 잊은 듯 살 있다.


그 이후로 그런 비슷한 증상을 두어 번 정도 더 겪고 나서야 내가 단순히 체력이 떨어진 것 때문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그건 공황 발작이었던 것이다.


이것저것 검색해보고 알아본 후에 병원을 방문해 병명을 알게 되어  충격을 받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힘들지 않은 건 아니다.

얼마나 더 많은 병을 앓아야 삶의 고통 속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운명이 꼬아놓은 내 행(幸)과 불행(不幸)의 장난질에서 놓여날 수 있을까...?


모든 병의 치료의 시작은 병을 인정하는데서 시작한다고 한다.


나는 나의 19번째 병 공황장애를 인지하고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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