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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나루 Jan 18. 2021

찰떡궁합 모녀(母女)의 사랑가(歌).(투병(鬪病)기.)

딸과 나는 soulmate♡

나는 셀 수도 없는 많은 병

(CRPS, 베체트, 자율신경 실조증, 섬유 근육통,  혈관성 두통, 우울증, 불면증, 불안장애, 역류성 식도염, 위염, 목 디스크, 척추관 협착증, 부정맥,  동맥류,중성지방,고지혈증 베체트 장염)  투병 중인 데다 자율신경 실조증 증상인 잦은 기절과 다리 수술 후에 생긴 CRPS로 혼자서는 외출이 절대 불가능한(아직 까지는, 그리고 의학적으로는) 환자이고, 이런 나를 오랜 시간 동안 간병하고 돌봐주며 내 손발이 되어주는 우리 딸도 많은 것을 양보하고 희생하고 내 병간호에 전념을 다해주었다.


우린 많은 날들을 눈물과 한숨으로 보냈지만 그렇다고 모든 날들을 눈물과 한숨으로만 보냈던 것은 아니었다.


만약에 ◇◇이가 내 옆을 지키고 간병하고 나를 살리려 애쓰지 않았다면 나는 진작에  무리했을 것이다.


딸이 태어나기도 전에 내 뱃속에 품고 있을 때부터 이미 짐작했었지만 딸과 나는 영혼을 나눈 soulmate♡이다.




내 주위에서 많은 엄마와 딸들이 속 깊은 얘기를 나누며 나이를 먹어 갈수록 찐 절친이 되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그렇지 않은 분들도 많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나는 비록 친정엄마와 살뜰한 상호관계를 맺을 수는 없었지만(그렇다고 착각하고 살았었죠.)  그랬었때문에 더욱더 딸과 친밀한 사이가 되기 위해 노력을 했다.


딸은 정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예쁘고 사랑스러웠고 내 몸을 다 갈아 바친다 해도 아깝지 않을 만큼 지극정성을 다해 키웠다.

내가 자라며 느꼈던 결핍에 대한 모든 것들을 ◇◇ 이가 겪지 않길 바랬고 ◇◇이가 하고 싶다는 것은 모두 해줄 수 있도록 경제적인 것도  갖추어 놓으려 애썼고 부족한 건 맞벌이를 통해 충당하려 계획고 노력했다.

친정아버지의 도움으로 가족들이 함께 모여 살면서 서로 부족한 부분을 충당하기 위해 도움을 주려고 노력했다.


난 아이의 든든한 기둥이자 울타리가 되고자 노력하면서도 아이 독립적이고 자유분방하게 자랄 수 있게 도와주고 대신에 자신이 내뱉은 말에 대한 책임과 를 요구했고 다행히 아이는 생각보다 내 뜻을 잘 따라주어 속 깊은 아이로 자랄 수 있었다.(정말 이상적인 얘기처럼 들리시죠? 그런데 정말 감사하게도 부족한 저에게서 실제로 이렇게 자랐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죠.^^)




내가 CRPS를 진단받은 이후로 나는 평생 겪어보지 못한 심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큰 고난을 겪게 되는 순간이 오면 부정-분노-협상-우울-순응의 5단계를 거치게 된다고 한다.


친정 가족들이 우리와 관계를 일방적으로 끊었을 때는 내가 CRPS를 진단받은 1년 후쯤이었다.


brunch book '6년 만의 산책'중에서

https://brunch.co.kr/@oska0109/11


그 무렵에 자율신경 실조증이 발병했고 나는 고난의 5단계 중 분노의 단계 어디쯤에 있었던 것 같았다.

평생 남에게 싫은 소리 한마디 안 하고 살던 내가 부정적인 만을 입에 담고 상대를 알 수 없는 분노로 매일매일 나 스스로에게 화를 내고 내 처지를 비관하고 내 운이 나쁨을 한탄하며 지랄발광을 해대고 있었다. 


다가 그때 마침 친정과의 갈등이 정점을 찍고 있었는데 정 가족들이 날 필요로 하던 그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했던 난 내가 그들의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 손절 당하고 마는 일련의 일들이 생겼었다.

내 배려와 베풂이 받는 이에게 감사와 기쁨이 아니라 권리와 의무가 돼버린 무참하고 충격적인 사건이었다.(내게 해리성 장애를 일으키게 된 중요한 일 이었습니다.)


그때 내가 그 지랄 발광하는 일마저 할 수 없었다면 숨을 쉬지도 먹지도 잠시 잠깐의 휴식도 가질 수 없을 만큼 지치고 괴롭고 무서운 때였다. 내가 나를 통제할 수 없어 무서웠고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는 병세에 정신을 차릴 수 도없이 휘둘리고 있을 때였다.


내가 이런 마음과 몸이었을 때 나를 지켜보는 딸의 심정을 어 말과 마음으로 표현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이는 자신이 사춘기로 방황할 때, 생각지 않은 진로변경의 문제로  갈등할 때,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옆을 지키며 몇 년의 시간을 매일 새벽 기도를 나가며 자신을 위해 기도해주고 자신의 선택을 지지해주고 응원해주고 격려해줬던 엄마의 마음을 잊지 않고 있었다고 얘기했다.

그리고  내게


"엄마, 엄마는 엄마 자신이 사랑받아보지 못한 방법으로 나한테 임없이 사랑을 증명해 줬어.

그게 항상 놀랍고 신기했어. 렇게 하는 게 오래갈까  싶기도 하고.

그런데 엄만 진심으로 나를 존중해주고 진심으로 나를 예뻐해 주고 지원해주고 시간을 주고 기다려주고 염려해주고 지켜주고 바르게 길러줬어.

엄마가 아니었으면 내가 이렇게 단단한 사람으로 자라지 못했을 거야.

이제는 내가 엄마를 지켜줄 차례야.

엄마, 나한테 조금 기대도 돼.

엄만 가 해주는 이 모든 일들을 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고 엄마가 내게 보여준 사랑들을 이렇게라도 조금, 아주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다면 내 인생의 지금 더디 가고 있는 몇 년  절대 허비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고 지 않아.

엄마가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럽고 지친 지 내가 알고 엄마가 알고  하나님이 아실 거라 믿어.

엄만 반드시 이겨 낼겨야,

내가 그렇게 되도록 도울 거야! 나 믿지? 날 못 믿겠으면 단 한순간도 엄마 옆을 떠나신 적 없는 하나님을 믿어. 내가 끝까지 함께 해줄 거야!!"


이 얘기를 듣고선 ◇◇이가 더 이상 내가  항상 품에 안고 젖을 물리던 나만의 딸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너무 감동을 받고 내가 아이를 잘못 키운 게 아니라는 사실에 하나님께 여러 번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이렇게 노력하는 딸을 위해서라도 나도 무이든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었다.(물론 단기 기억상실로 아직도 많은 것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딸이 없으면 아직 한 끼니의 약도 챙겨 먹을 수 없는 상태이지만 천천히 한 발씩 앞으로 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하지만 매일 셀 수도 없이 기절하는 일과(서있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돌발 통증 중에도, 씻는 중에도....) 수도 없이 생기는 돌발통 수시로 널뛰는 강점, 불면증, 두통, 섬유근육통으로 인한 통증들, 통증들, 통증들.... 과 싸우는 일을 딸과 나 둘이서. 

단 둘이서만 견뎌야 했다.

24시간 1분 1초도 내게서 눈을 뗄 수가 없 상황에 밖에서 일을 해야 하는 남편은 함께 있었지만 온전히 함께 겪는 것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딸은 공부하는 학생이기도 했다가 밥을 하고

청소를 하며 빨래를 .... 집안의 모든 살림을 책임지고 아빠가 하는 사업을 도우며 엄마의 수많은 약을 제시간에 챙기고 식사를 챙기고 기절한 나(엄마)하루에 열댓 번씩 침대로 옮기고 돌발통이 생겼을 때 1~3시간 가까이 나를 케어하고 한 달에 7~8번이 넘는 엄마의 병원 진료 스케줄을 챙겨 휠체어를 밀고 다니며 내가 기억 못 하는 내 증상들을 체크해서 의사 선생님들과 얘기하는 간병인의 역할까지 완벽하게 해.(이렇게 써놓고 보니 대단한 일을 혼자 해내고 있었네요.

매일 안아주고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얘기 하지만 오늘은 한번 더 안아 줘야겠어요.)




언제까지나 품 안의 아기일 것만 같았던 내 아기가 7년 가까운 시간을 내 버팀목이 되고 내 보호자가 되고 내 길잡이가 되어 든든히 나를 지키고 보살펴 주고 있었다.


내가 받지 못했던 사랑의 방식으로 아이를 믿어주고 칭찬해주고 용기를 주고 시간을 주며 엄마는 항상 네 편이고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널 지키고 응원하겠다고 약속했더니 아이가 어느새 자라 힘든 시간을 지나고 고난을 겪고 있는 엄마를 지키며 자신이 사랑받은 모든 것을 내게 되돌려 베풀어 주고 있었다.


내가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과 싸울 때도, 수시로 쓰러져 응급실로 실려가고 뼈에 금이가고 부러질 때도, 심한 고통과 괴로움에 나를 잃어도(해리 현상), 심지어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의 끈을 놓았을 때도 ◇◇이가 굳건하게 나를 붙잡고 버텨주었다.

이제는 딸이 나의  보호자가 되어 병원에서 하는 모든 검사나 시술, 수술 등에 사인을 하고 있다.


※brunch book '6년 만의 산책'중에서

https://brunch.co.kr/@oska0109/6

https://brunch.co.kr/@oska0109/16

https://brunch.co.kr/@oska0109/18

https://brunch.co.kr/@oska0109/17




내가 다시 살고자 마음먹고 평생 마음속에만 품고 있던 '글쓰기'에 도전할 수 있었던 것도 ◇◇이의 전적인 지지와 호응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 쓰고 있는 글들도 대부분 사실의 나열이나 겪은 일들을 풀어내는 것에 불과한 보잘것없는 글이지만 딸은 누구보다 열렬히 열광하는 구독자가 되어주고 날카롭게 비판? 하는 비평가도 되어주었다가 다음 편을 궁금해하며 포일러를 원하는 가까운 지인이 돼 주기도 하며 나에게 힘을 불어넣어 준다.


비록 부족한 글이지만 열심히 한편씩 쓰고 있는 이유는 무엇이든 목표를 가지고 다시 일어서려는 마음을 먹고 마음을 가다듬고 컨디션을 조절하다 보면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상태가 오는 날이 꼭 있을 거고 그때가 내게서 아이를 독립시키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난 딸이  내게 매여 병간호만 하다 젊은 날을 다 지나가게 둘 수는 없다.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큰 이유 중에 하나다.

난 딸아이 내게서 벗어나 반드시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며 불타는 사랑도 해보고 가슴 아픈 이별도 해보고 결혼은 할지 말지 모르지만 자신만의 충만한 삶을 누리고 살아가게 해 주려고 한다.

난 그러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언젠가 딸이 둥지를 박차고 날아오를 때 딸의 발목에 채워진 족쇄가 되지 않고 함께 날아 올라 딸의 날갯짓을 격려하고 어디든 날아갈 수 있도록 응원하는 부모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며 사는 것이 내 남은 생의 목표이다.




우리는 요즘도 매일 각자의 앞으로의 더 나은 일상을 위해 노력한다.

아직 내가 딸의 도움 없이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지만 어느 날엔간 웃으며 각자의 자리를 찾아갈 수 있을 것을 믿는다.


내가 딸을 사랑하고 딸이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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