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고통-난치성 혈관두통(2024.02)
앓고 있는 여러 질환의 증상은 시간이 흐르며 형태를 바꾸기도 하고, 잠시 잦아들었다가도 언제든지 맹렬히 되살아나곤 한다. 어떤 것은 변형되어 새로운 합병증을 불러왔고, 그런 과정을 오래 견뎌온 사람은 희귀 난치성 질환이나 중증 난치성 질환으로 긴 세월을 살아온 환자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처음 들은 병명 하나만 기억하고 그 이름으로만 환자를 본다.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분들도 많지만, 변해가는 증상과 고통의 실체를 타인이 온전히 알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내가 하루의 상태를 일일이 설명할 여유도 없이, 고통은 너무 자주, 너무 빠르게 닥쳤다.
지금은 그 순간순간 새로 밀려드는 통증을 겨우 붙잡고 하루를 견디는 일이 일상이다. 마음을 가다듬으려 해도, 통증의 불길이 번질 때면 숨이 막히고 손끝이 저린다.
내가 두통이 심하다고 처음 느낀 건 고등학교 2학년 무렵이었다. 입시 준비와 사춘기가 겹쳐 예민해진 시기, 나는 감정을 삼키며 억지로 버텨야만 했다.
그때의 두통은 명백한 신호였지만, 나는 그것을 병이라 부르지 못했다. 집에 늘 있던 진통제를 습관처럼 삼키며 버텼고, 결과적으로 두통은 잦아지고 강해졌다. 약물에 기댄 채 통증의 악순환에 빠져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두통의 강도는 더욱 잔혹해졌다. 머리가 깨질 듯 쪼개지고, 맥박마다 칼날이 박히는 느낌이 온몸을 흔들었다.
몇 번이고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고 바닥에 머리를 부딪치고 싶다는 충동을 견뎌야 했다.
그 통증은 일상을 잠식했고, 잠깐의 휴식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뒤늦게 ‘혈관성 두통’이라는 진단을 받았지만, 이미 20여 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수많은 약과 시술을 시도했고, 두통 보톡스부터 신약까지 안 해본 치료가 없었으나 두통은 좀처럼 물러나지 않았다. 때로는 병원에 입원해 쌓인 약물을 씻어내는 Wash out 과정까지 거쳐야 했다.
빛과 소리, 냄새, 음식... 사소한 자극들이 모두 두통을 폭발시키는 버튼이 되어 낮에도 암막 커튼을 치고 소음을 죽이며 생활해야 했다. 식단은 제한되었고, 집안의 모든 환경을 통제하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그 노력들로 희미한 희망을 품을 때마다 또다시 좌절이 찾아왔다.
결정적 전환은 CRPS(복합부위 통증증후군) 진단을 받았을 때였다.
그때부터 두통은 더는 통제 가능한 불편이 아니었다. 머리를 갈가리 찢는 듯한 통증이 일상이 되었고, 마약성 진통제와 패치, 수십 종의 약물이 겹쳐져도 고통은 잦아들지 않았다. 약을 줄이면 통증은 더욱 날카로워져 손에 쥔 것마저 놓치게 했다. 통증은 얼굴의 근육을 왜곡시키고, 왼쪽 얼굴은 마비와 같은 감각 이상으로 일그러졌다.
하루하루 통증의 연속이었다. 눈을 뜨는 순간부터 아이고, 머리야라는 말이 입에서 튀어나왔고 잠을 자는 순간에도 두통을 느끼며 깊은 잠에 들지 못한다. 내 모든 삶은 통증과 함께 계속되었다.
35년이 넘도록 단 한순간도 두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전부 불행했다고만 말하진 않겠다. 통증의 깊이는 때로 날 깎아내렸지만, 그 안에도 웃음이 스며든 순간들이 있었다.
감사할 만한 시간들이 있었고, 작은 기쁨이 놓여 있기도 했다.
아직 다 말하지 못한 상처들이 있고, 겪어보지 않은 이는 상상조차 못 할 무지막지한 날들이 있다. 그럼에도 나는 간절히 바란다.
언젠가 이 폭풍 같은 통증의 굴레에서 벗어나, 남아 있는 내 삶이 통증과 불행으로 완전히 잠식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