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은 자살이 마지막 증상인 말기질환(2025.09)
지독하게 절절 끓던 여름도 이제 서서히 꼬리를 감추며 아침, 저녁으론 제법 선선해져 가을이 오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요즘이다.
하지만 지난 한 달간 대상포진을 앓은 후의 여파가 아직도 남아 심한 근육통과 두통에 시달리고 있다. 그렇게 감당하기 어려운 몸의 여러 통증들과 무엇보다 대상포진을 시작하기 전부터 부쩍 극심해졌던 우울증으로 인해 난 다시 한번 목숨을 잃을 뻔했다.
2025년은 내게 여러 가지로 힘겨운 해로 기억될 것이다.
모든 사실은 시간이 지난 뒤에야 분명 해지지만, 이번 사고의 순간만큼은 정말 아찔하고 위험했다.
대상포진을 앓기 한 달여 전부터 내게서 점차 농담이 사라졌다. 아무리 힘들어도 나는, 나를 케어하느라 고생하는 딸 지니를 생각해 통증을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고 항상 재치 있는 농담으로 웃음을 만들었다.
그런데 사고가 생기기 전 두 달간은 농담 한마디, 웃음 한 조각 건넬 마음의 여유조차 내겐 없었다. 마음속에 있는 검은 늪이 점점 크고 깊어져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외로움과 상실, 고독이 날 선 검이 되어 나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갔다.
어느 날 딸과 얘기를 하던 중에, 참고 내색하지 않고 있던 것들이 폭발하는 일이 생기고 말았다.
얘기를 나누던 중에 작은 말다툼이 있었고 그것을 기점으로 공황발작의 신체증상까지 심하게 나타났다.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오고 발작하듯 몸부림쳤다. 딸은 나를 붙잡고 진정시키려 애썼지만, 그 손길이 잠시 느슨해진 순간 나는 거실 베란다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리고 힘 빠진 팔에 마지막 기운을 모아 난간을 붙잡고 매달리며 오른쪽 다리를 번쩍 들어 올렸다.
찰나에 이제 모든 것이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고통스러운 몸에 갇혀 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홀가분한 마음이었다.
딸에겐 말할 수 없이 미안했지만 훨훨 날을 수 있는 아이의 발목에 내 존재 자체가 족쇄처럼 매달려 있었다.
내가 안간힘을 쓰며 다리를 들어 올려 베란다 난간에 매달리며 기어오르던 순간, 들고 오던 물병을 내팽개친 딸이 엄청난 힘으로 나를 난간에서 떼어내 거실 바닥으로 내던졌고 나는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그 이후에 어떻게 진정이 되고 수습이 됐는지, 어떤 말이 오고 갔는지 잘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며칠 후, 놀란 마음으로 당장 내 정신과 예약을 당겨 병원으로 달려갔던 딸이 기가 막힌 이야기를 들고 돌아왔다.
내가 처방받아먹고 있는 약 중에 멀타핀이라는 약이 있다. 심한 우울증과 불안장애에 먹는 약인데, 한동안 다른 약 때문에 간수치가 높았던 관계로 다른 약을 끊으며 멀타핀의 용량을 줄이게 됐었다. 그런데 혈액 검사로 혈중에 남아있는 약물의 정도를 가늠하고 있었지만 멀타핀의 용량을 높여야 할 결정적인 시기를 놓치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난 병원 측의 어이없는 실수와 더불어 남편과 별거하고, 반려견을 보내는 상실에 못 이겨 다시 한번 목숨을 잃을 뻔했다는 사실이다.
멀타핀의 용량을 올리고 열흘이 지난 지금에서야, 종잡을 수 없이 수시로 흘러내리던 눈물이 조금은 멈추고, 신경질 적인 웃음 이나마 조금씩 지으며 농담인지 빈정거림인지 모호한, 그런 소소한 농담 이나마 던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평상시의 내 모습으로 돌아오려면 멀타핀의 용량을 더 올리던지 아니면, 생각보다 더 많은 시간이 지나야 된다고 한다.
아직도 내 상태는 당장이라도 깨져서 물속으로 빠져버릴 것 같은 깊은 호수 위의 살얼음 판 위에 서있는 기분이다. 팽팽하게 당겨진 내 신경은 손짓 한 번에 끊어질 것 같은 기타 줄처럼 위태롭기 그지없다.
말기 질환은 종류가 매우 다양하며 그것을 결정짓는 요인은 치료 자체가 거의 어렵다는 사실이다. 그중에는 모든 암성질환들도 있지만 그 외에도 임프육종과 같은 임프계질환, 신부전, 요독증, 뇌종양, 원인불명의 희귀성질환들, 등 현대의학으로 치료가 불가능하거나 어려운 질환들을 통틀어 말기질환이라고 한다.
나는 이미 베체트와 CRPS(복합부위 통증증후군)라는 두 가지 희귀 난치질환과 난치판정을 받은 혈관성 두통을 더해 세 가지의 말기 질환을 앓고 있다. 그리고 나는 우울증 역시 완치되는 병이라고 믿지 않는다. 그러니까 자살을 우울증의 마지막 증상(Suicide is the last symptom of depression)이라고 말한 다는 것이다.(우울증을 말기질환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주장과 논문들도 다수 존재합니다)
우울증을 말기 질환이라 부르는 일은 지나치다고들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이 표현이야말로 고통의 실체를 가장 정직하게 드러낸다고 믿는다. 우울증은 단순히 ‘기분장애’라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잠이 무너지고, 밥이 사라지고, 기억과 판단이 흐려지고, 사랑과 의지가 꺼져가는 그 총체적인 붕괴를 어떻게 기분 탓으로만 부를 수 있을까. 자살은 그 붕괴의 마지막 증상, 병이 끝내 내몰아 붙인 최후의 합병증일 뿐이다.
내가 ‘말기’라는 언어를 쓰는 이유는 단순하다. 끝없는 희망의 주문과 무의미한 치료의 반복에서 벗어나고 싶어서다.
조금만 더 버텨봐요.
이 말이 누군가에게는 따뜻한 격려일지 몰라도, 다른 이에게는 숨 막히는 도덕적 가스라이팅이 된다. 말기의 언어는 포기를 뜻하지 않는다. 완치라는 약속 대신, 고통을 덜어주고, 안전을 지키고, 관계와 일상을 다시 잇는 일로 목표를 바꾸자는 제안이다.
말기의 이름은 가볍지 않다. 오히려 무겁다.
그것은 이 병이 죽음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사회와 의료, 제도가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게 만든다. 자살을 개인의 나약함으로 치부하는 습관을 멈추고, 주거·빈곤·통증·외로움 같은 사회적 고통을 치료의 중심으로 데려와야 한다.
약과 상담은 여전히 필요하지만, 그 성과는 다른 기준으로 재야 한다. 수치의 호전만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낸 일, 고통이 한 칸 낮아진 순간, 나를 지탱해 줄 단어 하나로 생겨난 변화가 성과가 된다.
혹자는 묻는다.
말기라는 말이 절망을 확정 짓는 게 아니냐고.
나는 고개를 젓는다.
이름을 얻은 고통은 다룰 수 있고, 다뤄진 고통은 수치심이 아니라 존엄으로 옮겨간다.
나는 끝자락에 있다는 고백에 마음먹기에 달렸다, 햇빛을 쬐며 산책을 하면 좋아질 것이다라는 피상적이고 성의 없는 위로와 강요 대신, 그 끝자락에서 붙드는 방식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말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실제의 자원과 시간, 숙련과 연대가 따라야 한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말기의 언어는 얼마나 오래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내는가를 묻는다.
치료만이 전부가 아니다.
곁에 서 주는 일, 함께 버티는 시간이 곧 치료가 된다.
때로 사람에게 필요한 건 약이 아니라, 견딜 수 있는 밤과 이해받는 낮, 그리고 여기까지 온 당신, 충분히 잘했다는 한 문장이다.
그 문장을 들을 권리를 사회와 문화가 보장해야 한다.
내가 우울증을 말기 질환이라 부르자고 말하는 것은 죽음을 승인하려는 것이 아니다.
죽음과 등을 맞댄 채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더 현실적이고 덜 잔인한 돌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바꾸고 싶은 건 환자가 아니라, 곁에 서는 우리의 언어와 태도, 그리고 목표다. 그 변화가 시작될 때, 마지막 증상은 조금 더 늦게 오거나, 혹은 끝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더 이상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을 개인이나 그 가족의 책임으로 국한 짓지 않고 더 폭넓게 사회가 보듬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끝이 죽음으로 정해져 있다 해도 살아가는 삶 내내 죽음을 떠올리며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