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내 손에 죽는다.
얼마만큼의 시간 동안 그렇게 정신을 놓고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처음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진 않았다.
당장이라도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큰소리로 울며 모든 걸 다 말해버리고 싶은 충동과 싸우느라 모든 힘을 쏟아내야만 했다.
다만, 그 정신없던 와중에도 그렇게 하는 것은 현명한 방법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어둠이 짙게 내려앉아 깜깜해진 방 안에 앉아 있다 무거워진 팔을 들어 올려 화장대를 짚고 제 멋대로 휘청거리는 다리에 힘을 '꾹'주고 일어서서 내 휴대폰으로 남편의 휴대폰의 화면을 한 장, 한 장 사진으로 남겨 놓았다.
화장대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안 그래도 하얀 피부에 핏기가 다 사라지고 표정까지 없어져 어느새 흘러내려 있던 눈물 자국마저 없었다면 귀신이라고 해도 믿어질 것 같아 보였다.
남편의 휴대폰을 한 손에 쥐고 거실로 조용히 나가 딸아이에게 말을 건넸다.
"지니야. 엄마가 아빠랑 얘기할 게 있는데 지니가 좋아하는 '푸우 비디오'틀어 줄까? 잠깐만 얘기하면 되는데...?"
"네. 엄마. 피그렛 나오는 비디오 틀어주세요. 그리고 많이 싸우고 천천히 나와도 돼요. 지니 비디오 많이 보고 있어도 돼요"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은 말을 딸이 내뱉었다.
가능한 아이 앞에서는 큰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항상 조심했고 딸이 외갓집(친정)에 가 있을 때나, 잠이 들었을 때, 정 부득이한 경우엔 좋아하는 비디오를 틀어주고 남편과 나는 큰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조심했었는데 지난 몇 달간의 집안의 변화를, 엄마. 아빠 사이에 감도는 불화의 기운을 아이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거였다.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쓰던 내 마음도 그 순간에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딸에게 너무나 미안하고 속상하고 슬프고... 가슴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단장의 아픔이 이것에 비할까 싶었다.
죽어도 남편을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너는 이제 내 손에 죽는 거다.
그 순간 살아도 사는 게 아니고 죽어도 죽는 게 아닌 지옥을 보여주겠다 결심했다.
남편의 잘못된 선택 한 번이 한 가정을 망가뜨리고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없게 만들었으며 그 후로 23년간 나를 병들게 하는 초석을 다졌고 내 가족을 잃게 만드는 결과를 만들었다.
남편의 잘못된 선택이 나와 딸을 버리고 자신 또한 불행하게 만들어 버리게 된 것이다.
남편과 얘기를 나누었다.
처음엔 부인하던 남편도 빼박인 증거를 앞에 두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내게
"여보. 미안해. 그런데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하지만 당신이 몇 달 동안 그렇게 힘들고 내가 오해할 상황을 만들어서 당신을 속상하게 했다면 미안해."
라며 끝까지 뻔뻔함을 잃지 않는 초지일관의 자세를 보여줬다.
참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솔직히 얘기하고 그럴듯한 이유를 댔더라면 마음 약한 나는 한 발 물러섰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편의 그 대답으로 나는 전의(戰意 )를 불태울 수 있었다.
나는 남편에게 이혼할 생각이 있냐고 물었다.
"여보, 이게 전혀 그럴 일이 아니야. 나한텐 당신이랑 지니 밖에 없어. 이혼 이라니. 절대 이혼할 일 없어. 그런 소리 하지 마. 내가 오해할 만한 행동 해서 미안해"
라고 대답을 했다.
남편의 대답을 들으면 들을수록 내 마음은 더욱 차분해져 갔다.
"지금 내 기분이나 맘 같아선 양쪽 집에 다 알리고 자기를 이 집에서 당장 쫓아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
그런데 나도 생전 처음 당해보는 일이라 어떻게 해야 하는 게 맞는 일인지 잘 모르겠어서 하루만 생각하고 내일 저녁에 어쩔지 결정해서 이혼을 할지 말지 다 야기해 줄 테니까 하루 동안 가능하면 주변정리 깔끔히 하고 자기도 자기 생각을 말해주면 좋겠어.
내일이 우리 D-day인 거야. 알겠지?"
남편은 알겠다며 지금 당장 시댁과 친정 본가에 알리지 않아 줘서 너무 고맙다며 몇 달 동안 보였던 태도는 온데간데없이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아이에게 다시 나가 보았다.
물론 나에게도 뚜렷한 방법이나 기똥찬 수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고 누군가의 조언이나 도움이 절실했다.
그날은 딸아이를 재우고 거실에 나와 앉아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저에겐 결혼 전에 은행 다닐 때부터 가족같이 서로 아끼며 친하게 지내는 언니가 한분 있어요.
저하고 10살 차이가 나는데, 같이 있으면 가만히 있어도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을 나누며 서로를 챙기는 친구 같고 가족 같은 언니입니다.
그때 같은 지점의 직원들은 그런 언니와 나를 보며 '실과 바늘'이라고 부를 정도로 찰떡 같이 붙어 지내던 사이였답니다.
지금 30년이 다 되어가는 시간 동안, 또 자식들까지 서로 왕래하며 친 이모, 조카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다음 날 은행에 출근했지만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고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이는 나를 보고 담당 대리는 조퇴를 권유하기도 했다.
몸이 아프다고 생각했던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얼굴엔 핏기 하나 없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가끔씩 멍 때리고 앉아 정신을 못 차리니... 가정사로 인해 일까지 지장을 주게 되어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래선 아무것도 안 되겠단 마음에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 나 좀 도와줘..."
울음 섞인 내 목소리를 들은 언니는 점심시간에 맞춰 부리나케 내게 달려왔고 여러 가지 방법들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내게 당부했다.
"ㅇㅇ야. 아무리 힘들어도 울고 다니지 말아. 우는 건 나중에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알겠지?
그리고 알리게 되더라도 우선은 시집에만. 친정은 가능하면 가장 나중에 알려야 돼.
정말 이혼한다면 알리고 도움받아야 되지만 아직 너는 마음의 결정 못 내렸잖아.
혹시라도 알렸다가 이혼 안 하게 되면 네 남편, 네 꼴만 우스워지고 형제, 자매가 다 우습게 봐.
그러니까 끝날 때까지 정신 바짝 차리고 울고 싶음 차라리 언니한테 전화하고 가능한 차분히. 언니가 시킨 대로만 해.
잘 좀 먹고. 꼴이 이게 뭐야. 기운 내라."
언니의 이야기를 듣고는 머릿속과 마음속이 차분히 정리가 됐다.
이제 실행에 옮기기만 하면 된다.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후회하지 않을 결정을 내려 마무리하고 내 상처 난 마음을 치료할 수 있을까?
이제 다가오는 그날 저녁 남편과 담판을 지을 일만 남았다.
과연 내가 너를 용서할 수 있기는 할까?
결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to be continued.....